광개토대왕이 기가막혀

최근 세운 碑文 2개 일본 해석 그대로 따라
학계 "섣부른 복원 그릇된 역사 퍼뜨릴 우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지난 5일 충북 음성군 생극면에 있는 큰바위얼굴조각공원에 복원돼 화제가 됐던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문구다. 비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렇게 해석되어 있다. “신묘년 이래로부터 왜구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백제)과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4세기 후반, 한반도 남쪽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얘기다.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광개토대왕비(碑)가 국내 각지에서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수십년 동안 일본의 악의적 변조 의혹이 제기돼온 ‘신묘년 기사(記事)’가 그대로 새겨져 있어 “왜색(倭色) 광대토대왕비”란 비판을 받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한 카페촌 음식점 앞에 지난 6월 실물 크기로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도 마찬가지. 비석에는 음성군 대왕비처럼 논란을 빚고 있는 신묘년 기사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신묘년(辛卯年) 기사’란 서기 391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서술한 부분. 기사에는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왜(倭)가 맺고 있는 국제관계가 20자 짧은 문장에 담겨 있다.

지난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인 이진희(李進熙)가 일본군이 비문 중 25자를 변조했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신묘년 기사는 일본 야마토(大和)정권이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백제·신라·가야 일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 이진희 연구 이후 훼손 이전의 탁본을 구해 비문을 다시 해석하려는 시도가 국내 학계에서 줄을 잇고 있다.

단국대 사학과 서영수(徐榮洙) 교수는 “기본적으로 역사교육과 역사의식의 부재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며 “근시안적이고 상업적인 광개토대왕비 복원은 도리어 그릇된 역사인식을 전파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신묘년 기사 중 변조 의혹을 받고 있는 ‘倭’ ‘渡’ ‘海’ 자 부분을 판독 불가능하게 처리해 놓았다.

해석논란 부분

광개토대왕비 신묘년기사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斤羅以爲臣民

※( )안 글자는 변조 논란, ○는 지워진 부분.

=위당 정인보의 해석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백제)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기에)….

=일본 학계의 해석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대왕비는=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414년(장수왕 3년)에 세워졌다.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옛 고구려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다. 사각기둥 모양으로 몸돌의 높이 6.39m, 무게 37t에 달해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 비석 중 가장 크다. 몸돌 네면에 1775자(字)가 새겨져 있고, 150여자는 지워져 읽을 수 없다.

(조선일보 / 김정훈 기자 200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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