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2] 울돌목에서 불가능의 목을 치다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이순신2]

궤멸한 조선수군을 맨손으로 일으킨 이순신… 모든 지식과 역량을 쏟은 명량해전 승리의 비결


△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조선 수군의 전력은 대략 이렇다. ‘군함 300여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근….’

그 수군이 1597년 7월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다. 아니, 그냥 진 것이 아니라 ‘궤멸’됐다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일본군의 수륙 합동작전 앞에 무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총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 함대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160여척이 일본군에게 격파돼 남해바다에 수장됐다. 일본군은 칠천량 승리 뒤 한산도 일대와 고성 일대 포구에 남겨진 조선 수군의 배도 찾아내 모조리 불태웠다. 순신이 온 정열을 쏟아부어 일본침략군의 유일한 대항세력으로 성장시킨 조선 수군….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조선의 무적함대가 7년 동안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단 한번 처음 당한 이 참패로 사실상 궤멸한 것이다. 7월18일 패전의 소식을 들은 날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무의 상태, 교서 한장만 들고…

“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수군이 밤 기습을 당해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많은 사람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 통곡이 터져나오는 것을 이길 길이 없다.” 순신은 이때 복권된다. 수군 전멸에 경악한 선조가 경림부원군 김명원, 병조판서 이항복, 도원수 권율 등으로부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시라’는 제안을 받고 동의한 것이다. 선조는 순신을 재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오! 국가가 의지해 보장받은 것은 오직 수군뿐이었건만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림을 후회하지 않는지 흉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3도의 대군을 한 싸움에 다 없애버렸도다. 이제부터 바다 가까운 성읍들을 누가 막아주랴? 한산도가 함락됐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랴? …오로지 경은 일찍이 발탁해 수사로 임영하던 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다시 공업을 떨치어 임진년의 대첩 후에는 변방의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었건만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갈고 죄를 입은 채로 종군하게 한 것은 사람의 도모하는 바가 착하기만 하지 않은 데서 그리 된 일이라. 이같은 패전을 당한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경을 복권하고 복상 중인데도 뽑아내 백의종군으로부터 충청·전라·경상 등 3도의 수군통제사를 겸직할 것을 제수하노라.” 순신이 이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의 정황은 어떠했을까? 조선 수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군 궤멸에 따라 지상군도 곳곳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수령들은 ‘적이 다시 침략해온다’는 막연한 정보만 갖고 무리하게 청야령(淸野令·적군이 아군의 시설물, 식량, 군수물자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이것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명령)을 발동하곤 했다. 피난민은 저마다 산간으로 숨어들어가고 성읍과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군은 칠천량의 대승으로 조선 수군이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판단하고 지상전 중심의 호남 점령 전략을 추진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돌아 서해로 진출하는 대신 경상도 사천에 상륙해 서북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점령했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안전했던 호남은 갑작스런 일본군의 진격과 학살, 약탈로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1597년 8월3일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는 교서 하나만 들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거의 무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역경에서 순신이 선택한 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희망부터 복원한다 (2) 판단은 빨리, 행동은 총력전으로 (3) 내가 잘하는 싸움으로 판을 이끈다 (4) 죽으려 하면 산다

희망 복원, 빠른 판단, 총력 행동

첫째,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뒤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구례, 곡성, 보성으로 이동하면서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파한다. 백성들의 호응과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자신이 복권됐으므로 믿고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한다.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환호하며 다투어 술을 갖다 바칠 정도로 호응한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호남 진격으로 목숨을 걱정하던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다시 임할 것을 독려한다. 그 결과 군사들의 모병이 가능하게 된다. 피난민은 줄고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총력전 체제가 급속도로 자리잡게 된다.

둘째, 순신은 급박한 상황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한 뒤 곧바로 실천해나갔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8월3일부터 명량대첩이 벌어지게 될 9월16일까지 가진 시간적 여유는 고작 한달 열흘. 그사이 그는 총력을 다해 아직까지 안전한 군량창고를 최대로 확보하고 남은 군함을 찾아내 함대를 재편성한다. 이와 함께 수군 장수들을 확보하고, 군사들도 계속 충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군기확립을 위해 휘하 장수 이몽구가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치는 등 근본을 철저하게 다졌다.

△ 명량해전도1. 일본 군함이 밀집 형태로 해협을 통과하여 이순신 장군의 기함을 포위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조선 수군의 군함 12척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다.

셋째,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싸움터, 바다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전략 개념이 불명확한 조정에서는 한때 남은 군함이 12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약한 수군력으로 더 이상 해전을 수행할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러나 그는 절대 해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12척의 군함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였다. 순신은 나아가 이 바다의 전장을 치밀하게 연구해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는 전술을 세운다.

넷째,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죽을 각오로 싸울 때라야만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결사의 각오를 현실화하면서 기적은 일어난다. 세계사에 기록된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로 활용된 대포격인 총통. 이 총통을 배에 장착해 대장군전, 단석, 화포, 조란탄 등을 발사했다.

명량해전(울돌목 싸움)은 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 수군 대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본 군함의 수는 <이충무공전서> ‘행록’에는 333척, <징비록>에는 200여척, <명량대첩비>에는 500여척, <난중일기>에는 133척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군함 수의 차이는 울돌목 포구가 좁아서 싸움에 직접 참가한 일본 군함과 후방의 넓은 바다에서 전투 결과를 지켜보던 일본 군함이 분리돼 있었던 데서 생겨났다.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던 순간

9월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함선이 명량해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됐다. 일본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길이 2km 정도의 수로다. 평균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수심은 1.9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예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일본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왔다. 일본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 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순신의 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선 선두함이 걸렸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연달은 추돌 현상으로 일본 배들은 급속도로 진형이 무너져갔다. 혼란에 빠진 일본 군함을 향해 일제 공격이 벌어졌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이 발사됐다. 머리통만 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17전 17승, 가장 빛나는 승리


△ 거북선 내부의 모습. 거북선 안에서 총통을 발사하는 조선 수병의 밀랍인형 모형.

 

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 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됐다.

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17차례.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17전 17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이겨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이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지식, 전 역량을 던져 조선의 운명을 바꿔냈다.

 


이순신은 일본에게도 군신

러-일 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전 뒤 자신을 넬슨 제독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으로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당시 도고 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인 가와타 쓰도무 소좌는 ‘함대가 출동할 때 이순신 장군의 영에게 빌었다’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땅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력, 그의 지모와 용기,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상찬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


△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 그림.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진 것을 숨긴채 전투를 벌이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일제시대에도 통영 충렬사에서 진해 해군사령부의 주도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진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적장이었던 이순신을 사실상 그들의 군신처럼 떠받든 것이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국사’(國師)라는 칭송을 받은 시바 료타로는 이런 이순신 열풍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창설한 뒤 아직 자신이 없었기에 동양권에서 배출한 유일한 해군 명장 이순신을 연구하고 대단히 존경하게 됐다.”

<근세일본사>에는 이순신과 노량해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 7년 동안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 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한편 구한말에 활동했던 미국의 선교사 겸 사학자로 <대한제국흥망사> 등 역저를 남긴 헐버트(H. B. Hulbert)는 한산대첩과 관련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한산도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며, 도요토미의 명나라 정벌의 웅도를 좌절시킨 일전이었다.”

*살라미스(Salamis) 해전: 기원전 480년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함대가 병력과 장비가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둔 전투.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한겨레21 2004-10-19)


※ 명랑대첩비


△ 명랑대첩비 : 보물 제503호

 

명랑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년), 대학자 이민서가 비문을 짓고 당대의 명필 이정영, 김만중이 글을 쓴 명랑대첩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의 조선총독부에 의해 높이 2.67m, 폭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은 경복궁 근정전 뒷뜰에 묻혀 버렸다. 당시 일본인 경찰들은 비석을 아예 없애려 하였지만 비석을 옮기는 도중 인부와 목수가 죽는 등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감히 실행을 못하고 그냥 땅속에 묻어 버린 것이다.

해방후 수소문 끝에 땅속 깊이 묻혀 있던 명랑대첩비를 발견하게 되었고 1950년에 노력끝에 비각이 만들어져 비를 세울 수 있었다. 명랑대첩비는 1965년에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었고 1966년에는 사당이 지어졌다.

명랑대첩비는 국가의 대난이 예상될 때면 검은 물이 비석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영험을 갖고 있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6.25 한국전쟁과 1980년 5.18광주 민주항쟁 당시 나라를 걱정하는 눈물을 흘렸다한다. 밀양에 있는 사명대사비와 함께 신비한 비석으로 알려지고 있다.

 (위치 :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186-7)


 

[이순신 1]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

충무공 이순신 어록과 난중일기

거북선 원형 베일 벗나

 

k365 - 한국해, 독도, 고구려사 지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