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원형 베일 벗나

세밀히 묘사된 고서화 뉴욕서 첫 공개
3층모양에 제원 기록도… 복원 기대


거북선의 원형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가 16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거북선의 모습은 ‘이충무공전서’(1795년 간행)에만 대략적인 스케치로 그려져 있고 몇몇 민화 형태로 전해오긴 했지만 사실적으로 묘사한 고서화가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 고서화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학계에서 극소수 학설로 알려진 3층 거북선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가로 1.4m, 세로 2.39m 크기로 2장의 대형 비단천에 그려진 그림은 거북선 4척과 판옥선 1척, 소형선 7척 등과 장수들이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병사들이 무기를 점검하는 모습, 평상복 차림의 민간인들이 보급물자를 나르는 모습 등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또 윗등이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는 등 거북선 모양에 대한 학자들의 엇갈린 주장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의 원형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서화는 그림을 그릴 당시에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 깃발 등 일부분에 남아 있으며, 일본에 건너간 뒤 색깔이 바래지자 덧칠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현기자

특히 서체가 바래 육안 해독은 불가능하지만 왼쪽 하단에 일본으로 반출된 후 일본사학자가 ‘해동편(역)사’에서 발췌해 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 제원이 기록돼 있어 적외선 촬영 등을 통해 판독이 이뤄질 경우 거북선의 완전 복원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고서화는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서진무역 윤원영 사장이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미국인 엘리자벳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으며, 16일 뉴욕한국일보를 통해 공개됐다. 평양 숭실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한 선교사 데이빗 마우리의 손주 며느리인 마우리 여사에 따르면 이 고서화는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처음 발견된 것으로 1970년 일본골동품반출협회의 허가를 받아 미국에 반입됐다.

재미 한국고미술연구가인 최영래씨는 "최근 조지아대학에 의뢰해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이 그림이 그려진 연대가 최고 1640년대로 추정됐다“며 “임진왜란(1592∼1595) 후 거북선 기지창을 직접 보고 그린 실경화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김노열 기자 2004-8-18)

한산대첩 통영으로 이전 추진되는 한강거북선

한산대첩의 고장인 경남 통영으로 수로 운송을 통해 이전이 추진되는 서울 한강 거북선.

(연합뉴스 2005-7-12)

"거북선 후진도 자유자재"

“한국엔 이런 신기한 배(거북선)가 없죠? 우리 일본의 자랑입니다.”

1978년 일본 니가타(新潟)현에서 기술연수를 받던 김영성(66)씨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그날 김씨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일본인 사장의 집에 ‘거북선도’가 걸려 있었다. 일본인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대 일본의 전함입니다.”

식사는 뒷전이고 설전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아세요? 그때 왜선이 거북선한테 얼마나 당했는데….(김씨)” “근데 왜 한국엔 거북선이 남아있지 않습니까?(일본인 사장)” 화가 치민 김씨는 귀국하자마자 조선실록, 경국대전, 난중일기, 임진장초, 비변사감록 등 거북선 관련 서적 80여종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그렇게 거북선과 인연을 맺었다. 내친김에 전공인 금속조각을 살려 거북선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올해로 27년째다. 그는 사비를 털어 2~3년 걸려 만든 거북선을 부수고 또 부수었다. “도공이 공들여 지은 자기를 깨뜨리는 것과 같죠. 전 장사꾼이 아니라 연구가이니까요.”

한 때 공들였던 모형들도 지난해 이맘 때 다 박살을 냈다. “거북선의 후진원리를 규명해 원형의 88%를 복원한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니 전에 만든 건 거북선이 아닌 셈이죠.” 30일 그는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 군함 모형전’에서 ‘조선수군의 거북선 재조명’이란 주제로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거북선 후진원리를 재현할 길이 1.5m짜리 거북선 모형도 공개한다.

거북선의 후진 여부가 관심을 끄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돌격선으로 쓰인 거북선은 함포사격은 물론이고 충파(衝破)공격도 담당했다. 부딪히고 빠지기 위해선 후진이 필수라는 것. 하지만 지금까지 그 원리가 밝혀지지 않아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는 “거북선 구조가 복잡한데다 자료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며 “노는 놔두고 격군의 위치만 반대로 바꾸면 후진이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모형뿐 아니라 실제 배의 후진원리 규명을 위해 영종도 부근에서 사람까지 구해 실험해 성공했다.

최근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는 거북선이 역사왜곡 시비를 겪는 등 거북선 원형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게 사실. 김씨는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거북선은 모두 8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널리 알려진 게 철 갑판에 용머리를 쳐든 전라좌수영 타입과 나무 갑판에 용머리가 선체와 수평을 이룬 통제영(경상우수영) 타입이라는 것. “드라마에 나오는 거북선은 쉽게 말해 둘을 합한 영호남 화합형입니다.”

28일로 460회 충무공 탄신일을 맞는 그의 감회 역시 남다르다. “충무공은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명장이죠. 하지만 심복까지 참수할 정도로 잔인했어요. 거북선은 구조가 복잡해 군기가 바짝 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죠. 그러니 충무공의 일벌일계 방침은 거북선을 움직이기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 불가피했죠.”

거북선 얘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던 그는 가족에 대해 묻자 주춤했다. “선친께선 친일파였어요. 부끄러웠죠. 거북선에 미칠 수 밖에요. ‘(친일행위를) 반성한다. 열심히 해서 꼭 복원해라’라는 유언을 받고서야 선친을 용서했어요.” 그는 매달 10여만원의 연금으로 생활하는데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딸(35)까지 있다. 한 척에 90여만원이 드는 거북선 모형을 만들기 위해 지인들에게 손 벌리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도 연구를 멈출 수 없다. “자꾸 욕심이 생겨요. 88%를 복원했으니 89%, 90%…. 그러다 보면 거북선을 완벽하게 복원할 날이 오겠죠. 8종류의 거북선 모두 만들 겁니다. 그때까진 숨이 붙어있어야 하는데….”

(한국일보 / 고찬유, 김광수기자 2005-4-27)

일본에도 '거북선'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불굴의 의지를 배우자는 '이순신 바람'이 거센 가운데 거북선의 위력에 공포심을 느낀 일본이 거북선의 모양을 베껴 만들었다는 '귀갑선'의 이미지가 네티즌들의 '조롱' 속에서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일본의 거북선'이라는 제목으로 떠돌고 있는 이 사진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거북선으로 인해 일본이 대패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북선을 본 따 만든 '귀갑선'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달려 있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귀갑선의 모양이 거북선과는 너무 다르다면서 "거북선의 짝퉁", "짜가 거북선", "거북선이 아니라 고등어선이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 네티즌은 "일본에서 '짝퉁 거북선'까지 만들어낸 것을 보면 거북선의 위력이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난 99년 2월13일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은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통해 거북선의 구조 및 위력과 함께 일본의 귀갑선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1904년 한 일본 해군장교가 저술한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라는 책에 '귀갑선 제7도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럭비공 모양의 거북배가 등장한다. 앞뒤가 생선머리 모양으로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우리 거북선과는 크게 다르게 생겼다.

'일본제국해상권력사강의'는 "조선의 장수 이순신이 거북선을 창조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군이 당시 이 배 때문에 크게 대패함으로써 즉시 흉내내서 귀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귀갑선은 강 같은 좁은 곳에서만 쓰였을 뿐 해전에서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보유한 성능 좋은 군함인 판옥선을 개조해 만든 거북선은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 접근하기 전에 지휘선을 박살내는 돌격선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가들은 거북선에 대해 용머리가 들락거리며 대포를 쏘았던 것은 물론 전후좌우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적진 속을 기민하게 뚫고 들어가 일본 수군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전투함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일보 2005-5-3)

[시론] 이순신 리더십의 비밀

이순신 장군 드라마에 이어 요즘 서점가에는 이순신 리더십을 다룬 서적들이 넘쳐난다. 임진왜란의 전쟁 영웅 이순신이 치밀한 전략과 리더십을 갖춘 CEO형 지도자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현상이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로 요약되는 절대 열세인 조건에서 뛰어난 기지와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오히려 승리를 일궈낸 그의 리더십이 현대 경영현장의 실전 전술로도 본받을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적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이순신의 리더십이 단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는 비상한 결심이나 고정관념을 깨고 적의 허를 찌르는 식의 전술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에 나간 장수 중 비상한 각오를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허를 찌르는 전술은 저 멀리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흔히 사용되어 오던 것이 아니던가.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명량해전 등에서 거둔 이순신의 전공(戰功)은 사실 거북선과 판옥선(板屋船)을 제조한 조선의 선박기술과 일본보다 월등히 성능 좋은 화약을 제조할 수 있었던 화학기술에 힘입었던 바 컸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화약을 직접 제조하기 시작한 것은 주지하듯이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서다. 중국은 이미 10세기께부터 화약을 사용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전쟁무기로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화약 제조술을 일급비밀로 해서 고려에 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최무선은 끈질긴 노력 끝에 결국 그 비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당시의 화약은 염초.유황.숯가루를 섞어 만들었는데 최무선은 화약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성분인 염초(焰硝.초석 또는 질산칼륨)를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고 유황과 숯가루를 섞는 비율을 연구하여 화포를 개발해 냈다.

최무선 이래 우리나라는 화약 제조술에 관한 한 일본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무기도 다량의 화약을 이용할 수 있는 화포 위주로 발전하였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 화기인 조총(鳥銃)을 주무기로 하였으나 조총은 사정거리가 짧아 지상전이 아닌 해전에서는 그다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구나 뚜껑을 덮은 거북선이나 판옥선에 대해서는 무력하기만 한 반면 조선의 중화기인 화포는 먼 거리의 일본 선박도 격침시키는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의 혁혁한 전공 뒤에는 당시 조선의 기술 경쟁력이라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육지전에서의 참패와 달리 유독 해전에서 승리를 거듭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화약 제조술의 우위에 기반한 것이었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면 적보다 우수한 특정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의 리더십은 뛰어난 지도력에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결합된 소위 기술기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 지식기반 산업사회에 들어선 한국이 요즘 곳곳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나아가야 할 확실한 방향을 설정하고 매진하기보다는 우왕좌왕 갑론을박하면서 세월만 낭비하고 있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 제조업 기반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긴 지 오래고 차세대 성장동력이라 할 수 있는 신산업의 비전은 아직 가시권에 들어와 있지 않다. 흔들리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이 강소국으로 균형자 역할을 자임하려면 역시 탄탄한 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도 행정 서비스도 모두가 환골탈태해 산.학.연 연계 시스템으로 포괄돼야 한다. 민.관이 한자리에 모여 주식회사 한국호의 앞날을 설계하고 중지가 모이면 한번 신바람 나게 달려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과학기술과 산업기술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이순신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바다.

<최홍건 한국산업기술대 총장>

(중앙일보 2005-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