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과 우리의 과제

해양경찰청은 공부하는 토요일을 맞아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2시간 동안 4층 강당에서 청장 이하 전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지용희 교수의 특강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순신 리더십과 우리의 과제' 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특강(8월 21일)은 이순신 장군의 정신, 리더쉽, 전략에 대한 심층분석과 아울러 거룩하고 숭고한 나라사랑의 얼을 일깨워 주었다.

어떠한 악조건에도 좌절하지 않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17전 17승을 이끌어낸 성웅 이순신. 그의 리더십을 벤치마킹하면 지금의 무한 경쟁시대에서 일류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① 신뢰성 = 이순신 장군은 청렴결백, 공평무사, 정직을 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백성과 군사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이순신이 나타났다는 말에 도주했던 패잔병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1792년 프랑스 혁명때 혁명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786명의 스위스 용병' 이례로 스위스 용병이 신뢰의 상징이 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② 겸손 = 오만과 자만! 이것이야말로 모든 전쟁이나 경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자만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기는 커녕 문제 자체가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며 남이 문제점을 지적해 주어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이제 우리도 우물안 개구리 같이 만만한 경쟁 기관이나 고객만 상대하면서 오만에 빠져들 것이 아니라 세계 제일의 기관을 경쟁 상대로 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메워 나가야 하겠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의 승리의 공을 모두 부하들에게 돌렸으며 자신밖에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땐 신이 도와주었다며 한없는 겸손함을 보여 주었다.

③ 불굴의 의지 = 모진 모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항상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초개와 같이 던졌다.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와 패잔병, 어부로 구성된 오합지졸을 이끌고 200여척의 일본 정예 함대와 맞붙어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뤄낸 이순신 장군이 포기를 종용하는 임금 선조에게 "우리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설득한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포드, 마이크로소프트, 휴렛 패커드 등 세계적 기업들이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맨주먹의 기업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망각한 채 우리는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못한다고 야단이다.

④ 끊임없는 혁신과 창의성 = 백병전에 약한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보강하고 적의 약점에 대한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거북선은 장군의 현실 타개 의지와 무한한 창의력을 상징한다.

현실에 안주하는 개인, 기업, 국가는 경쟁자에게 곧 추월당하고 만다. 끊임없는 개선과 혁신을 통해 남이 쉽게 겨냥하기 어려운 목표물로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⑤ 정보 중시 전략 =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훤히 꿰뚫고 있었으며 작은 정보를 얻기 위해 피난민, 포로 등도 활용하였다.

충무공처럼 백전백승의 결과를 얻으려면 자신이 처한 환경을 면밀히 파악하고 자신과 상대방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⑥ 철저한 기록 정신 = 임진왜란 7년의 와중에 쉬지 않고 일기를 써 귀중한 '난중일기'를 남겼다. 2539일간의 기록인 이 일기에는 전쟁에 관련된 많은 기록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에 대한 자료까지 담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우리는 고려자기를 세계에 자랑하지만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한 지금에도 이를 똑같이 재현하지 못한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은 일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개인에게는 지난 일을 끊임없이 반추하고 앞날의 실수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자기 반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⑦ 기타 = 이 외에도 완벽한 준비, 위기관리 능력, 솔선수범, 인간애 등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탁월한 리더쉽은 지금 같이 경쟁이 치열한 때에 우리에게 더 큰 본보기로 다가온다. 오죽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 함대와 맞서 싸우지 말라"는 명령을 문서로 하달하였을까...

(국정브리핑 2004-8-26)

[전문가 시각] 상식을 존중하는 지도자

최근 TV드라마를 통해 이순신을 좀더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원작 소설의 저자인 김탁환씨의 강의를 통하여 이순신의 위대함이 평범함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그가 (내가 여태까지 들어 알고 있었던 것처럼)어려서부터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위대한 품성을 지녔고 다른 아이들과는 본질적으로 하는 짓이 달랐다면 그가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해도 나는 그를 위인으로 존경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신화의 주인공일 뿐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선천적인 특출한 능력보다는 성실하고 겸손한 노력에 의하여 역사의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면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삶을 변화시킬 중요한 비결을 배우고자 할 것이다.

폭발적이고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무인의 자랑이던 시절에 이순신은 상사인 이일 장군으로부터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결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치사하게도(?) 계급장을 떼이고 군졸로 다시 시작하는 구차한 삶,무인으로서는 치욕의 길을 택한다. 백의종군이란 얼마나 굴욕적인 선택인가. 그런가 하면 당시의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이순신은 상민은 물론 노예들과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하여 계속 토론을 한다. 거북선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많은 호탕한 무인과 문신들이 일본을 왜(倭)라 하여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자랑이던 시절에 일본에 대하여 여러 채널을 통하여 자료를 모으고 연구를 한다. 그는 적과의 싸움이 격렬할수록 밤에는 홀로 앉아 묵상하며 수많은 기록을 남기는데 이들 기록에는 승리와 성취에 대한 감정적 도취보다는 현실에 대한 우울한 분석과 치밀한 대책이 나온다. 그리고 수군의 총수답지 않게 자신의 아픔과 연약함을 수없이 토로한다. 과학자도 아니지만 모든 관련된 사람들과 만나서 모든 일을 세밀히 검토하고 분석하고나서 거의 확실한 승산이 있을 때에야 전투에 나선다.

이러한 성격과 일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출세하기 힘들다. 자신이 맡은 일에 관련된 실제 상황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냉정하고 철저한 준비를 하기보다는 상대방, 특히 자기 상사의 기분을 헤아리고 그에 맞는 말과 행위를 해주는데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인정받고 출세의 사다리를 쉽게 타고 오르는 법이다.

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철저하게 밑바닥부터 다지고 준비하는 사람만이 실제로 그가 속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나서서 일하는 사회는 발전하는 사회이다. 이순신과 같은 사람들이 사회의 전면으로 나서지 못하는 사회는 퇴보하는 사회이다. 사회는 이순신과 같은 사람을 발탁하고 품어주는 유성룡과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내면의 정신과 확실한 실력의 기반 없이 외형의 화려함만 추구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다.

내면의 실력을 꾸준히 갈고 닦는 것은 성실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길이다. 상식과 합리라는 평범한 것에서 시작하여야만 우리는 진정한 위대한 결과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누구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과는 거래하고 꾸준히 토론하는 것은 상식적인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이라는 뿌리에서 출발하지 않고는 비범의 열매에 다다를 수 없다. 일단 남과 달라야 하고 옳건 그르건 간에 일단 튀어야 남에게 인정도 받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라면 이순신의 리더십은 확실히 그것과 다른 것이다.

이순신과 조선의 역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내용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서 일단 남의 이목을 끌고 보자는 생각으로 트릭을 쓰고 이벤트를 만드는 등 그릇되거나 과장된 행동을 일삼는 것은 결국 망한다는 것이다. 좀 부족하고 느려보여도 올바른 방향을 향하여 꾸준하게 나아가는 것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우리가 진실로 깨달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자세와 행동은 오늘부터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상식과 합리성을 뒤엎으려는 음모와 유혹이 많다.

이순신은 적과 싸우기 전에 이러한 내부의 적들과 싸워야 했다. 현란한 유혹을 궤뚫고 냉정하고 확실하게 내면을 보고 계산하였다. 그래서 그야말로 내부와 외부의 적이 우글거리는 악조건에서 23전 23승의 놀라운 승리를 그가 사랑하던 겨레와 나라에 안겨주었다. 이순신은 상식적인 것을 항시 존중한 것 같다. 과학기술이나 정치나 산업의 경영이나 모두 철저하게 상식적인 것에 그 뿌리를 박고 나아가야 한다. 위대한 것은 상식적인 것과 절대로 충돌하지 않는다.

<경종민 / KAIST 교수·전자전산학과>

(국민일보 2005-4-20)

[21세기 왜 이순신인가] 문화계, 충무공에 푹 빠졌다

406년 전 노량 앞바다에서 순사한 충무공 이순신이 되살아나 우리 문화계를 석권하고 있다. 2001년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다시 불기 시작한 ‘이순신 열풍’은 충무공을 소재로 다룬 오페라, 만화, TV 드라마, 영화, 게임 제작 등으로 이어지며 문화계에 전방위로 퍼지고 있다.

◆ 대통령이 뽑은 책, 칼의 노래=열풍이 가장 뜨거운 곳은 단연 출판계.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에 주목한 칼의 노래는 출판계의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4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칼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높은 관심에는 두 차례나 이 책 ‘지지’를 표명한 노무현 대통령이 큰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MBC 방송 프로그램 ‘느낌표’에 출연, 이 책을 꼭 읽어보라며 “뭐라 할 수 없다. 굉장하다”고 칭찬했다. 노 대통령은 올 상반기 탄핵 기간 다시 책을 꺼내 읽었고 충무공 유적지를 돌아보려 했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 이순신’ 지지층은 지식인·대학생들 사이에서 일반 대중으로 넓혀졌다.

‘칼의 노래’보다 3년 먼저 세상에 나와, 신격화된 이순신을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원균을 맹장으로 묘사해 파문을 일으켰던 김탁환의 ‘불멸(3권, 1998)’도 ‘불멸의 이순신(8권)’으로 개작돼 최근 선보였다. 모두에게 익숙한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선조’로 상징되는 절대 왕권에 끊임없이 의문을 갖고 번뇌하는 이순신을 그린 ‘불멸’은 ‘이순신 폄훼’라는 거센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이순신 다시 보기’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다. 배우 박중훈을 캐스팅해 지난주 촬영에 들어간 영화 ‘천군’에 등장하는 이순신은 호국영웅이 될 가망이 전혀 없는 건달 청년. 과거 낙방 후 인삼 밀무역에 몰두하는 한량 이순신을 우연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남북한 군인들이 맹훈련해 변모시킨다는 줄거리다. 천군의 민준기 감독은 “성웅이 아니라 소시적 과거에도 떨어지는 좌절을 겪었지만 노력으로 큰사람이 돼 가는 청년 이순신을 보여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만화 동네에도 이순신 다시 보기가 유행이다. 최근 1, 2권이 나온 ‘대장군 이순신’의 충무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요괴들과 싸우는 10대의 어린 퇴마사로 묘사된다. 또 칼의 노래와 불멸 역시 각각 만화로 출판됐으며, 이 밖에도 열 군데 이상의 출판사가 이순신 관련 만화를 준비 중이다.

◆ 이순신 열풍의 함정=한때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잊혀진 역사 속에서 끄집어낸 우상(偶像)이란 비판까지 받았던 이순신이 2000년대 다시 주목받는 것은 매우 이채롭다. 이순신이 대중 속에서 되살아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중문화·평론계에서는 이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권위시대에 걸맞은 영웅 재발견 과정의 하나로 본다. 충무공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의 삶에 담긴 위대함이 이 같은 논쟁을 무력화해버렸다는 것.

하지만 이 같은 이순신 열풍의 ‘오용’을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특히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영웅 대망론’을 경계했다.

“이순신을 기리는 것은 좋지만 ‘그 같은 영웅이 이 시대에 나왔으면 좋겠다’는 영웅 대망론은 경계해야 합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며 정치인들이 ‘나랑 똑같네, 이렇게 싸움을 치렀다니’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한다면 이는 이순신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현대인이 그를 다시 호명하는 건 한국 사회가 갖지 못한 가치와 덕목을 충무공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어떤 영웅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김씨가 발견한 이순신의 덕목은 ‘도덕성과 합리성’이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도덕성과 거북선에 내포된 창조적 합리성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도덕성과 결합된 합리성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자, 이순신의 이름에서 권위를 느끼게 하는 원천적 근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이순신에 내재한 가치를 다층적으로 보고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 영원한 생명력 지닌 충무공 어록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前方急 愼勿言我死) => 戰方急 愼勿言我死

제게는 아직도 전선 열두 척이 있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必生卽死 死必卽生) => 必死則生 必生則死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此獸若除 死卽無憾) => 此讐若除 死則無憾

(세계일보 / 박성준 기자 2004-7-29)

30일 ‘Weekend+’커버스토리 충무공 어록

지난달 30일 ‘Weekend+’커버스토리에서 다뤄진 충무공 어록 가운데 한자 일부를 바로잡습니다.

충무공의 유언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의 한문어록은 “戰方急, 愼勿言我死”로 ‘이완행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에 상응하는 어록은 ‘必死則生, 必生則死’입니다. 12척으로 왜선 130여척에 맞서야 했던 명량해전을 앞두고 충무공이 휘하 장수들에게 당부한 말로 ‘난중일기’ 1997년 9월 15일자에 적혀 있습니다.

최후의 결전 노량해전을 앞두고 함상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향불을 피우며 하늘에 다짐한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의 한문어록은 ‘원수 수(讐)’를 쓴 ‘此讐若除 死則無憾’인 것으로 ‘이완행록’에 전해집니다.

(세계일보 2004-8-5)

충무공 이순신의 명언들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1592 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포심과 전쟁경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지라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칠천량해전 이후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고 수군을 재정비한 결과 전선 12척에 군사 120명이 다였다. 그러자 "수군을 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임금의 밀지가 떨어졌고, 충무공은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조정에 강력히 건의.)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내며.)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좌수사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나라의 물건을 마음대로 자를 수 는 없다." (전라 좌수사가 객사에 사람을 보내어 거문고를 만들 오동나무를 찍어 오라고 고흥지방의 만호인 이순신에게 청하자 이렇게 말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

이순신 한시 '한산도가' 보성에서 지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 (閑山島歌)' 의 한시 (漢詩) 원본이 처음으로 공개된바 있다.
몇 년 전 서지학자 이종학 (李鍾學.독도박물관장) 씨에 의해 원본자료가 공개된후 '난중일기' 등이 이제까지 발견된 이순신 장군의 서체와 동일한 친필임이 확인됨에 따라 '한산도가'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뤄져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이다. 
 
학계에 따르면 '한산도가' 는 이제까지 알려진, 이순신 장군이 1595년 8월 경남 충무의 한산섬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1597년 추석 전남 보성에 있는 열선루 (列仙樓)에서 지어진 詩라는 것이 확실시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공개된 한시의 원본 끝에 정유 (丁酉) 중추 (仲秋)로 그 시기가 밝혀져 있고 '난중일기' 도 당시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 방면을 바라보며 지은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친필의 원본이 한시인 만큼 국문 시조 작품을 훗날 '이충무공전서 (李忠武公全書)' 편찬시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 이라고 밝혔다.
특히 지난번에 공개된 '한산도가' 에 의해 시의 첫 글귀가 '한산도 (閑山島)' 가 아닌 '한산도 (寒山島)' 로 적혀 있는 것도 처음 알려짐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당시 일본군에 빼앗긴 한산도를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담는 뜻에서 본래 글자인 '한가로울 閑' 자 아닌'찰 寒' 자를 쓴 것으로 보인다" 고 주장했다.
 
■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1597년 8월 9일> 저녁에 보성 조양창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 곡식은 봉한채 그대로였다. 군관 네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1597년 8월 11일> 어제는 송희립과 최대성이 보러 왔다.
<1597년 8월 14일> 오후에 어사 만날 일로 보성군으로 내려가 잤다. 이날 밤 큰비가 왔다.
<1597년 8월 15일> 보성군 무기고를 점고하여 네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때 흰 달이 다락 위를 비치니 심회가 편안치 못했다.
 
이 난중일기를 분석해 보면 '1597년 음력 8월15일 "저녁때 흰 달이 다락 위를 비치니 심회가 편지 못했다" 는 내용으로 봐서 당시 보성 최대성 장군의 軍營에 속해 있는 보성 '열선루'에 있으면서 왜군에 빼앗긴 한산도를 생각하며, 이 시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고 있다. 
 
한편 열선루의 위치에 대하여 보성군은 "열선루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보성읍 보성리 805-20번지로서, 그곳에는 현재  '보성읍 안식일교회' 가 있으나 그곳이 옛 열선루 부지로 추정된다" 고 전해왔다. 
 
또한 열선루 복원에 관해서는 " '한산도가'가 보성 열선루에서 지어진 詩라는 것이 확인되면 학술적, 사실적 가치를 인정하여 마땅한 곳에 건축물 복원 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안내문설치, 기념비 시설 등)으로 문화 유적지로서의 그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 고 밝혔다.

(브레이크뉴스 / 최재승 기자 2004-9-5)

`난중일기`

"비. 비.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싸움하는 군사들이 오죽 답답하겠는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5월 25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난중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내용을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

최근 새롭게 출간된 '난중일기'(김경수 편역)는 몇 가지 점에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순신은 사려 깊은 인간미를 지닌 인물 이었다.

1592년 3월 4일 일기를 보자.

"서문 밖 연못 구덩이와 성벽을 올려 쌓는 곳을 순시했다. 아산으로 문안갔던 나장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

이날 일기 외에도 이순신이 가족들과 부하들을 생각하는 구절은 여러 군데 나 온다. '난중일기'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무장이 쓴 일기답게 전체적으로는 딱딱하고 간결하다. 하지만 군데 군데 숨어있는 인간적인 정취를 읽어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난중일기'에서는 원균과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1594년 8월 30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는다.

"원 수사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

원균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뒤늦게 알게 된 이순신은 인간적인 고뇌를 느낀다. 그러나 일기 어디에도 도를 넘어 그 문제를 놓고 분개하지는 않는다.

일기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특성은 치밀함이다. 그날 날씨, 주둔지 주민 여론, 적 동향, 중간관리 충성도에서부터 군량미 상태에 이르기까지 이순신의 치밀함은 매우 놀랍다.

전쟁터의 긴박한 순간을 기록한 대목에서는 의연함이 느껴진다.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적진으로 들어갔지만 여러 배들이 진군하지 않아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됐다. 나는 부관을 불러 물러간다고 살아남을 것 같으냐고 다그쳤다 ."

누가 뭐래도 이순신은 대단한 인물이다. 도대체 어느 누가 전쟁통에 이렇게 상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 점 하나만으로도 이순신은 충분히 위대하다.

<행복한 책읽기 펴냄>

(매일경제 / 허연 기자 2004-9-3)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조 선조 역사에서, 아니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두 인물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을 들 것이다.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은 비단 한국사의 위인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거인이라 해도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인됨을 처음으로 나라 밖의 '세계'에 알린 사람은 명의 수병도독 진인. 정유재란때 지원군으로온 중국의 무장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임진왜란 당시의 재상 유성룡은 그의 '징비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진인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 하였다. 나는 진인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꺼리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서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성룡은 이러한 진인과 함께 있으면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진인이 이순신을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공)이 있는 위인이라 칭송하고 제 나라 황제에게도 아뢰어 충무공에게 명의 도독인을 내리게까지 하였다. 이순신의 '재주와 책략과 기량과 능간' 앞에 마침내 포악한 진인도 마음으로부터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과 충무공은 다같이 53세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두사람의 삶에는 닮은 점보다 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이 순경 속에 있었던 성군이라면 충무공은 역경의 극한상황과 싸워 이긴 성웅이었다.

임란 7년간에 걸쳐 쓴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필사본 국보 7호)는 눈물 없이는 읽어낼 수 없는 책이다. 이순신의 삶은 '비극적인 삶'이었다. 그에게는 세종대왕에겐 없는 '비극적인 위대함'같은 것이 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전권을 일관하여 반복되고 있는 듯한 세가지 모티브가 떠오른다.

첫째는 출중한 무장이 간결하게 기록한 엄격한 진중, 생활속의 '루틴'(일상과정). 둘째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토로하는 회포와 가족애,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 그리고 셋째는 임란 개전초부터 충무공을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괴롭혀 온 문제의 인물, 경상좌수사 원균의 존재가 곧 그것이다.

이 원균이 이순신을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고가는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적 스케일'을 갖는 일대 음모극이다. 그 모함의 덫에 걸린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영웅에서 하루 아침에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 얼토당토 아니한 죄명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리스 고전비극의 주인공처럼 '비극적 무죄' 속에서 죽어가려는 그를 가까스로 구해낸 사람이 우의정 정탁.

왜구의 재침이 임박한 정유년(1597년) 4월초 1일 "옥문 밖으로 나왔다"는 말로 반년만에 다시 계속된 '난중일기'는 "울적한 마음한층 이기기 어렵다"고 적혀 있다.

관직을 삭탈당하고 풀려난 이순신은 행주대첩의 영웅 권율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 었다. 이미 그의 나이 42세때 녹둔도 사건으로 백의종군 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는 충무공 앞에는 보다 더 가슴 쓰라 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음이 그것이다.

출옥한지 열흘째 되는 4월11일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벽에 꿈이 몹시 산란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다.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다. 그래서 종을 보내서 어머님의 안후를 알아 오게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3일.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다 어찌 적으랴(뒷날 대강 적었다).".

본시 '난중일기'는 그 첫장부터 자나깨나 극진하게 어머니를 생각하는 이순신의 효심이 도처에서 독자들의 가슴을 때린다. 예컨대, 임진년 (1592년) 정월 초 1일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과 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계사년(서기 1593년) 4월초 4일 "맑음. 이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계사년 6월12일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다. 흰 머리털이 싫어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은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해 전란이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서 이순신은 어머니를 찾아 뵙게 된다. 갑오년 1월초 1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 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동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충무공의 어머니다운 현부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으로 애를 태우다가 돌아가신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때부터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순신의 내면을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정유 4월16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은 것만 같지 못하구나…"(정유 4월19일).

이해 7월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이 왜군 의 유인전술에 빠저 거제 앞바다에서 전멸됨으로써 일찍이 이충무공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어리석은 조정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한다.

충무공이 붙잡혀가면서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할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비축해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약 1만석이 있었으며 화약은 4천근, 총통은 각선척에 적재한 것 말고도 3백자루나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옥에서 풀려나 다시 통제사가 되어 내려온 이순신에게는 모든 것이 소실되어버리고 고작 군사 1백20인과 병선 12척이 남아있을 뿐이 었다. 이때의 충무공 모습을 생각하면 코카서스산의 독수리에게 가슴을 갉아먹힌 프로메테우스처럼 '신화적인 스케일'을 갖는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정 유년 9월, 충무공은 이 12척의 전선으로 1백30여척이 몰려든 왜군 과 싸워 기적과도 같은 명량대첩의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 해전 전야 의 '난중일기'는 특히 주목을 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고 엄격히 약속하였다. 이날 밤 신인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정유년 9월15일).

그 뒤 충무공의 장렬한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난중일기'에는 물론 그 기록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정인보는 일찍이 '혼자서 전민족을 구해낸' 충무공에 대한 '보공'의 전이 너무도 허무하여 무덤 앞 신도비 하나나마 수삼대를 지나서야 겨우 서게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정조대왕이 '이순신 신도비명'을 쓴 것은 1794년, 충무공 사후 2백년이 다 되어서이다. 왕명에 의해 '이충무공전서' 14권8책의 활자본이 간행된 것도 1795년의 일이다.

내년 1998년은 충무공의 4백주기가 되는 해이다. 공의 3백주기는 격동의 구한말에 아무도 챙기지 못한채 지내고 말았다. 그러나 '덕을 표시하고 공로를 보답함은 국가의 거룩한 예전'(상덕보국 유국최전)이다. 충무공의 4백주기를 내년에 어떻게 치를지 두고 볼 일이다.

<최정호 연세대 교수·언론학>

(조선일보 1997-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