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고구려사 책자' 배포중단 외압 논란

고구려연구재단(연구재단)이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할 예정이었던 '고구려사 읽기자료'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외교부 등 관련부처의 제동으로 인쇄조차 유보돼 논란이 예상된다.

연구재단은 지난주 홈페이지를 통해 고구려사 읽기자료 배포신청을 받아 이번주에 인쇄를 마친 뒤 일선학교에 배포할 계획이었다.

고구려연구재단의 한 핵심관계자는 15일 "학교현장에서 사용할 것인데 '중국이 고구려사를 어떻게 왜곡했는가'에 포커스를 두고 배포됐을 때 중국과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염려가 많아서 당분간 인쇄와 배포를 유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외교부에서 제동을 걸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고구려사 읽기자료 배포와 관련) 다양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쪽 의견이 강하게 전달됐을 것"이라고 말해 '배포 유보사태'의 중심에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외교부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전태동 외교부 동북아2과장은 "그런 요구를 한 적 없다"고 전면 부인하면서 "교육부의 소관사항이니 교육부에 문의하라"고 말했다.

또한 연구재단의 한 관계자는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 공문을 보내 자료배포를 유보하는 게 좋겠다고 요청해왔다"고 밝혔다. 이에 최원일 동북아시대위원회 사회문화협력팀 과장은 "자료배포를 유보해달라고 요청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이어 최 과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중·일 역사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라는 지시가 있어 연구재단과 외교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고구려사 읽기자료 배포문제가 거론된 적은 있다"고 밝혔다.

이는 '동북아 역사문제가 동북아 협력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판단 아래 외교부와 동북아시대위원회 등이 회의석상에서 연구재단에 자료배포를 유보해 달라는 '압력'을 넣었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원하는 학교만 배포하는 것으로 수정했지만 결국 인쇄조차 못해

연구재단은 이미 7월에 자료제작에 착수해 8월 말 초안을 내놓았으며 이후 수정을 거쳐 최종자료를 완성했다. 그리고 지난주 배포신청을 마감하고 이번주에 인쇄한 다음 바로 발송작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초등학교용은 만화로, 중·고등학교용은 삽화가 곁들인 읽기자료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또 일선교사들을 위한 심화자료도 따로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자료는 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 쪽의 반박의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으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배경에 대한 설명 등이 포함돼 있다.

애당초 연구재단은 교육부와의 협의를 통해 자료를 일선학교에 직접 배포할 계획이었지만 외교부 등의 제동이 잇따르자 원하는 학교에만 배포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연구재단의 한 관계자는 "일부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좀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는 교육부를 통해 일선학교에 배포한다는 당초 계획이 외교부 등의 제동으로 인해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만 연구재단이 직접 배포하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외교부가 고구려사 읽기자료 배포에 제동을 걸었다'는 주장은 이미 지난 4일 국회 교육위의 교육부 국정감사 때 안병영 교육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에 의해 공개된 바 있다.

당시 열린우리당 유기홍 의원이 "9월 초에 고구려사 읽기자료를 준비해 초·중·고에 배포하기로 했는데 한달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됐느냐"고 추궁하자 안 부총리는 "자료는 이미 마련됐다. 다만 최근 외교부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의 이름으로 학술자료를 내놓은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조율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안 부총리의 발언은 결국 "외교부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고구려사 읽기자료의 배포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에 대해 유 의원은 "(자료배포에) 제동을 건 관련부처에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말한 뒤 "외교적 마찰을 이유로 민간단체의 고구려사 홍보활동을 제약하면 어떡하느냐"며 "이미 마련된 자료는 배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 "중국쪽에 똑같은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고려해야"

'자료 배포 유보사태'에 대해 김육훈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자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어 딱잘라 말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정부 차원에서는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고려할 수 있다"며 "하지만 자료가 객관적으로 서술돼 있는데도 배포에 제동을 걸었다면 정부가 너무 과도하게 중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서길수 교수는 "연구재단이 정부에서 100% 출연한 기관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중국쪽에 똑같은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사려깊게 생각해야 한다"고 신중한 자세를 요구했다.

서 교수는 "중국에서 연구재단과 비슷한 기관이 고구려사 왜곡자료를 일선학교에 배포했을 때 거기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며 "이런 일은 순수민간단체에서 하는 게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오마이뉴스 / 구영식 기자 2004-10-15)

외교부, 고구려사 중국 눈치보기...수업자료 배포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