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정 교수 "단군은 만들어진 신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는 치우천황이라는 신화적 영웅을 한국사회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응원단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가 치우천황이었기 때문이다. 왜 치우였을까?

고조선사 연구에 주력하는 역사학자 송호정(宋鎬晸.41) 한국교원대 교수는 최근 펴낸 단행본 「단군, 만들어진 신화」(산처럼刊)에서 "우리 역사를 오래되고 우월한 것으로 보고 싶어하는 국수주의적 역사인식"에서 초래된 결과라고 진단한다.

송 교수는 "치우천황은 황제(黃帝)의 자손이라고 자부한 중국인들의 조상으로 황제, 염제와 같이 민족 시조로서 상징적 인식을 한 것이지 실재했다고 믿는 사람은 적어도 학자들 사이에는 없다"면서, 그럼에도 이런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간주 하는 것은 "신화와 전설을 실제 역사로 믿고 싶은 이들의 환상이요, 집착일 뿐이다" 라고 비판한다.

단군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단군릉 등 고조선과 관련해 각종 매체에 비교적 평이한 논조로 발표한 글들을 묶은 이번 책에 드러난 송 교수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단군과 단군신화는 실재가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둘째, 그렇기에 이런 만들어진 신화를 실재로 간주하는 '재야사학'에 대한 전면비판이다.

이런 비판의 대상으로는 1993년 소위 '단군릉' 발굴 이후 대대적인 단군 및 단군조선 실재화 작업을 벌이고 있는 북한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는 "(단군)신화의 내용은 전적으로 꾸며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 그대로도 아니다"면서 "단군신화는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고조선을 일으키면서 자신들의 집권이 정당하고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었음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상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송 교수는 단군과 단군신화는 역사상 허구이지만, 그런 허구가 한민족 정체성의 구심점을 형성하면서 "민족의 위기 때마다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기제로 작용해왔음"을 아울러 주목한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4-10-7)

‘단군,만들어진 신화’ 저자 송호정 교수

지난 1993년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에서는 능 하나가 발견됐다. 단군과 그의 부인의 뼈가 묻힌 단군릉. 근거는 두가지였다. 평양 강동 지방에 단군릉이 있었다는 ‘숙종실록’ 등 문헌 기록과 ‘출토된 인골의 연대 측정 결과가 단군조선이 개국한 기원전 2333년과 비슷하다’는 고고학적 증거. 당시 금동관을 쓸 인물은 단군 외에는 없다는 논리로 무덤은 단군릉이 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인골 연대 측정에 사용된 전자상자성 공명법은 1만년 이상 된 유물에 주로 적용하는 방법’이라거나 ‘무덤 형식과 출토 유물이 4세기 이후 고구려 무덤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반증은 무시됐다.

단군은 신화인가, 역사인가. 고조선의 주무대는 한반도인가, 만주인가.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연구는 역사적 질문 이상의 논쟁거리를 품고 있다. 고려 무신 정권 이후 단군은 민족의 시조로 민족 통합과 통일 이데올로기의 역할까지 떠맡았기 때문이다. 단군이 신화라면 우리는 민족의 시조를 잃어버리는 것이요, 고조선의 주무대가 요동·요서까지 확장되는 순간 대한민국은 ‘만주 벌판을 휘젓던’ 대제국의 후예가 된다.

하지만 송호정(41)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역사학이 사료 비판과 합리적 추론의 의무를 저버리는 순간, 더 이상 학문일 수 없다”며 “단군으로부터 무거운 짐을 다 덜어내야 우리 고대사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단언한다. 개축의 흔적이 없는 단군릉에서 어떻게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출토됐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을 내놓지 못하는 한 단군릉은 역사가 될 수 없다.

송 교수는 단군에 대해서도 ‘역사적 상황을 담고 있는 신화’로 간주한다. 단군신화는 실존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사실(史實)을 추출해내는 것은 역사가의 몫으로 신화 자체가 바로 역사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단군왕검 역시 자연인의 이름이라기보다 고조선 시대 임금을 나타낸 칭호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는 “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단군 영정은 민족 시조로서의 상징일 뿐 고조선을 건국한 특정 인물 단군을 그린 것은 아니다”며 “단군 동상 역시 이런 의미에서 난센스”라고 주장했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송 교수는 “기원전 2333년은 ‘삼국유사’에 근거해 해석한 ‘동국통감’의 견해로 근거가 희박한데다 교과서가 청동기 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15∼13세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과도 배치된다”며 “만약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됐다면 신석기 시대에 거대 정치체가 생겨났다는 말인데 이는 세계사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고조선이 서쪽으로는 북경 근처의 난하, 동북쪽으로는 흑룡강 일대까지 지배한 거대 국가였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도 사료를 토대로 비판하며 “고조선은 만주를 지배한 대제국이 아니었다”고 결론내렸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보듯 역사는 가장 첨예한 이데올로기 각축장이자 영토 전장(戰場). 송 교수의 주장 역시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라거나 “고대사 축소의 음모”로 공격받는다. 이에대해 그는 “한국사의 유구함과 영토의 관대함을 밝히려는 과도한 의욕은 되레 열등감의 표시”라며 “잘못된 국수주의를 벗어버릴 때 고조선에서 발해까지 우리 고대사와 국가 형성의 과정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고구려사 침탈 등 인접국의 고대사 왜곡에도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일보 / 이영미 기자 200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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