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되면 간다, 가면 안온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정보기술(IT) 컨설팅업체인 이코퍼레이션.JP를 운영하는 염종순 사장은 요즘 ‘일본에서 잘나가는 한국인’이다. 그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한 1990년대 말 엔지니어로 일본에 건너가 ‘성공 신화’를 이뤘다.

염 사장의 현재는 화려하다. 종업원 20명의 작은 업체를 운영하지만 아오모리(靑森) 시의 정보정책조정감(부시장급)을 맡고 있으며, 오키나와 우라소에(浦添) 시의 전자정부 구축 사업도 진행 중이다.

“기술 인력에 대한 대우는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좋습니다. 여기 있는 한국 기술자들은 모두 ‘한국에 있었으면 박봉에다 대기업 뒤치다꺼리만 했을 거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한국은 이미 ‘동북아 인재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으로 떠나는 한국인 고급 인력이 급증하는 반면 한국의 외국 인재 유치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다. 중국과 일본으로의 인재 유출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 기업들은 한국 기업의 개발팀을 통째로 빼내는 등 ‘인재 사냥’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인맥을 이용하거나 헤드헌팅 전문가를 한국에 파견해 고급 인력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GM대우의 마티즈 승용차를 그대로 베낀 것으로 화제가 됐던 중국 체리자동차도 사실은 대우 출신 엔지니어들을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현지에 있는 한국 인력도 중국 기업들이 노리는 대상이다. 베이징(北京) 소재 국연컨설팅의 김덕현 대표는 “한국 기업의 중국지사에 있던 임원과 고급 기술자들이 임기가 끝난 뒤 중국의 같은 업종에 경영진으로 취업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면서 “국가정보원 관계자가 중국을 방문해 ‘이직 후 영업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 받는다’는 강연을 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중국으로의 인력 유출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배영준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국 기업들이 글로벌화되고 기술 수준을 높일수록 한국 인력에 대한 수요는 커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기술자뿐만 아니라 마케팅이나 기획 인력의 유출도 발생할 전망이라고 한다.

○ 일본, IT업종 중심으로 유치 노력

일본의 한국 인력 수입은 ‘현재진행형’이기보다는 ‘미래형’에 가깝다. 아직까지는 인력 유출 규모가 중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취업난이 가중되고 기술 인력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특히 IT 업종을 중심으로 한 일본 진출이 계속 늘고 있다.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한국산업인력공단을 통해 일본으로 취업한 IT 인력은 502명. 다른 경로까지 합치면 2003년 이후 일본으로 간 IT 인력은 수천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정부가 ‘e저팬’ 프로젝트에서 밝혀놓았듯이 일본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한국 인력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일본 IT 인력에 대한 기업 수요는 연간 10만2000명에 이르지만 자체 공급이 가능한 인력은 4만 명 수준이다. 이런 의도는 일본 정부의 제도 변화에서 잘 나타난다. 일본 정부는 이미 2003년에 한국 정부와 IT자격 상호인증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국에서 ‘검증받은’ 인력을 거추장스러운 절차 없이 데려가겠다는 뜻이다.

○ 급여-교육 질 한국보다 높아 선호

중국과 일본으로 인력이 빠져나가는 이유는 급여뿐 아니라 ‘삶의 질’이 국내보다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극심한 취업난이 계속되면서 제대로 된 직장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의 중산층 소득이면 가사도우미와 운전사를 거느리고 상류층 생활을 할 수 있다. 중국 기업들은 핵심 인력에게는 연봉 이외에 주재비(연봉의 50%), 주택, 차량까지 준다. 교육 여건도 좋다.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다니며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익힐 수 있다.

취업포털 ‘스카우트’의 안희 차장은 “중국에서 한번 살아본 사람은 이곳 생활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며 주재원들이 ‘주저앉는’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도 생각보다 급여와 대우가 괜찮아 살 만하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 취업 IT 인력을 교육하는 서울산업통상진흥원(SBA)에 따르면 일본에서의 초임은 개인 능력에 따라 2000만∼5000만 원. 국내 IT분야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취업자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취업자들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에 아직까지 계약 기간 중간에 돌아오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 기업-정부 무대책… 인력유출 통계조차 없어

인력 유출에 대한 한국 기업 및 정부의 대응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 씨가 일하던 대기업 인사담당자는 “인력 유출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것이 없다”며 “인력 유출 방지책으로는 보상시스템 강화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술 유출로 ‘홍역’을 겪은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주려 하고 있다”는 ‘소박한’ 답변을 내놓았다.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경영관리 수준이 낮은 중소기업들의 경우 보호막이 아예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 대책도 부족하다. 현재 고급 인력의 국제 이동에 대한 공식 통계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민간 헤드헌팅 업체와 산업인력관리공단 등이 부분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인 수치는 추정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반면 미국 등 선진국은 과학기술 분야 인력 데이터베이스를 국가 주도로 운영하고 있다.

유희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원장은 “핵심 성장산업 분야의 우수인력 유출이 심각하다”며 “선진국 수준의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문권모 기자, 김재영 기자, 김광현 기자>

■ 사람이 재산인데… 인재유출 후진국 겨우 면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세계은행,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등이 발표하는 고급인력 유출입 조사를 보면 한국은 만성적인 ‘두뇌 수지’ 적자국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IMD가 조사한 2006년 두뇌유출지수(Brain Drain Index·유출 경향이 강할수록 0에, 유입 경향이 강할수록 10에 가까움)를 보면 아일랜드(8.14), 미국(7.84), 핀란드(7.59), 스위스(7.29)는 두뇌가 몰려드는 국가들이다.

반면 러시아(2.71), 중국(3.22), 폴란드(3.92) 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은 급격한 사회변동 탓으로 두뇌유출이 극심하고 국가적 중대한 고민거리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은 4.91로 조사대상 58개국 가운데 38위. 1996년의 7.21과 비교하면 10년 사이 2.3포인트 감소했다.

LG경제연구원의 배민근 연구원은 “한국의 두뇌유출지수는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돼 왔고 지금은 간신히 후진국을 면한 수준”이라며 “인재가 가장 큰 자원인 한국으로서는 선진국 진입에 빨간등이 켜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계은행의 두뇌유입 비율을 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2000년 한국의 두뇌 순유입비율은 ―1.4%로 1990년의 ―1.3%보다 더 악화됐다.

반면 호주 11.4%, 미국 5.4%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은 대부분 순유입국 지위를 지키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미국과학재단의 박사 취득자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는 이공계 고급인력의 두뇌유출현상을 보여 준다.

2004년 현재 공학, 자연과학, 생명과학 등 이공계 분야 한국인 박사 가운데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 체류할 계획을 가진 비율은 73.9%였다. 이는 20년 전인 1984년 50%보다 23.9%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직업능력개발원의 진미숙 선임연구위원은 “고급두뇌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찾는 좋은 일자리가 국내에 많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실제적으로 귀국을 결정할 때는 국내 집 값, 자녀 교육환경 등 실제적인 문제도 크게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김광현 기자>

(동아일보 2006-12-23) 

사라진 팀원들… 中-日, 한국서 무차별 인재사냥

국내 대형 가전업체의 공장 책임자로 일했던 A 씨는 현재 중국 가전업체 B사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B사는 A 씨를 영입한 뒤 생산시스템은 물론 운영방식과 조직문화까지 그가 과거에 근무했던 한국 직장을 모방했다. A 씨는 “기회가 되는 대로 한국에서 유능한 후배를 데려오라”는 회사 측 요청을 받고 그동안 7명을 끌어들였다.

한중일 동북아시아 3개국 간에 ‘인재 유치 대전(大戰)’이 한창이다. 문화적으로 비슷해 서로의 인적 자원을 활용하기 쉬운 점을 감안한 인재 쟁탈전이다.

그러나 ‘전쟁’은 한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흘러가고 있다. 중-일 두 나라가 적극적인 공세를 벌이는 반면 한국은 일자리 부족 때문에 해외로 빠져나가는 인력이 적지 않고 인재 유지를 위한 기업들의 체계적인 전략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산업 발전에 도움을 줄 한국의 첨단기술 인력에, 일본은 노령화로 인한 일손 부족을 덜어 줄 실무 인력에 특히 눈독을 들이고 있다.

○ 중국과 일본으로 떠나는 한국의 고급 인력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나간 고급 기술 인력은 9000여 명. 전문가들은 이들 중 3000∼4000명이 중국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취업 전문 사이트 ‘차이나통(通)’을 통해 중국 현지에 취업한 사람도 2001년 1094명에서 올해 2232명으로 크게 늘었다. 전체 취업자 세 명 중 한 명은 ‘순수 중국 회사’에 취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자국의 정보기술(IT) 경쟁력 강화 및 노령화로 인한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인력을 끌어가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IT 강국으로의 재도약을 주 내용으로 하는 ‘e저팬’ 2차 프로젝트와 관련해 한국과 중국 인력을 많이 활용하려고 한다. 현재 일본 헤드헌팅 업체들은 ‘IT 한류(韓流)’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인력 유치에 적극적이다.

○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타격 줄 수도

반면 한국의 ‘성적표’는 너무나 초라하다. 정보통신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IT 전문 인력은 1122명. 이 중 중국인은 87명, 일본인은 41명에 불과하다. 국내에 취업한 전체 고급 외국인 인력도 어학원 강사를 제외하면 200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국내 인재들이 중국과 일본으로 몰려가는 이유는 이들 국가의 기업이 국내보다 나은 대우와 생활 여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들은 “한국에서의 낮은 처우를 생각하면 돌아가기가 싫다”고 말한다. 국내 한 기업의 베이징(北京) 주재원은 “최근 한국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주재원을 줄이면서 현지에 남으려고 사표를 던지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문권모 기자, 김재영 기자>

(동아일보 2006-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