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지’ 이분법에 자유·평화 위태

“백악관 보좌관들은 단어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9·11 테러 이후 떠오른 ‘적’(enemy)을 한 단어로 뭐라고 규정할 것인가. ‘이슬람주의’로 하자는 의견부터 ‘지하드주의’로 하자는 의견,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하자는 의견까지 다양한 견해가 쏟아졌다.”

<뉴스위크> 최신호가 전한, 지난해 가을 백악관의 풍경이다. 이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최근 런던 항공기 테러음모 사건이 발생한 직후, 테러리스트들을 ‘이슬람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난주엔 “전체주의적 이념을 가진 과격분자들의 네트워크”라고 길게 표현했다.

9·11 테러사건 뒤 5년이 지났다. 세계적 규모의 대테러 전쟁을 수행하는 조지 부시 미 행정부는 ‘적’을 규정하는 용어에서 왜 아직도 고민을 하는 것일까. 이 고민은 어쩌면 현대전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규모가 클지 모를 ‘테러와의 전쟁’이 안고 있는 한계와 혼선에 맞닿아 있다.

부시의 대테러전 인식 = ‘적’에 관한 단어 고민은 9·11을 바라보는 부시 행정부의 인식 혼란과 맥을 같이한다. 부시 대통령은 9·11 직후, 테러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를 뛰어넘어 ‘미국에 위협이 되는 모든 세력’을 대테러 전쟁의 대상으로 선언했다. 알카에다와 별 관계가 없던 이라크 침공(2003년)은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리스트와 그들을 지원하는 세력을 구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세계를 ‘적 아니면 우리 편’으로 나눴다. 전선은 확대됐고, 미국의 단순한 이분법을 향한 비판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테러와의 전쟁’ 5년 만에 세계인의 미국 호감도는 전후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 종식을 위해선 “전세계 민주주의가 확산돼야 한다”고 믿었다. 단 1%의 테러 가능성만 있어도 먼저 제압한다는 선제공격론이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 기조가 됐다.

‘불량국가’(rogue state)들은 부시의 1차 목표였다. 이라크 정권은 이미 전복됐고, 북한·이란 옥죄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뒤에도 이라크 혼란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북한·이란 압박은 아직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타임>은 최신호에서 “(부시에게) 대테러 전쟁은 곧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부시의 분석이 옳았는지 모르지만 그 실행은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자유와 질서의 충돌 =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은 ‘전시 대통령’이 됐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부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가장 큰 집행권한을 가진 미국 대통령일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 자유와 기본권을 제약하는 대통령 행정명령이 남발됐다.

전화 도청이 법원의 영장 없이 비밀리에 행해졌고, 미국령 관타나모 수용소에선 기약 없는 테러용의자 구금이 이뤄졌다. 미 역사상 유례없는 자유와 질서의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공화당 상원의원인 척 헤이글조차 “부시 행정부는 의회를 헌법적으로 귀찮은 존재쯤으로 여겼다”고 말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 전쟁 방식을 놓고 미국내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백악관 관리들은 “부시가 가는 길은 올바르다. 수십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결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어도 9·11 5주년인 이 시점까지, 많은 전문가들이 “테러 위협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실패했고 세계는 더 위험스럽게 변했다”고 주장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라고 <타임>은 밝혔다.

 

(한겨레신문 / 박찬수 기자 200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