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백두산 공정’ 현장을 가다…노골화하는 역사-문화 왜곡

《백두산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숨결을 떼어내려는 중국 정부의 ‘백두산(중국명 창바이·長白 산) 공정’이 최근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이 지난해부터 백두산 개발에 힘을 쏟기 시작하면서 백두산에서의 ‘한민족 흔적 지우기’가 노골화하는 느낌이다. 중국은 이 같은 ‘역사 및 문화 세탁’을 거쳐 백두산을 세계유산에 등록함으로써 영토분쟁이 끝나지 않은 백두산 지역을 확고부동한 중국의 영토로 세계에 알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 노골화하는 역사, 문화 세탁

올해 들어 중국 지린(吉林) 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안투(安圖) 현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진과 창바이(長白) 조선족자치현 등 백두산 자락의 한글-한자 도로표지판은 한자-영문 표지판으로 줄줄이 교체됐다.

당초 조선족 자치지역이어서 반드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하도록 돼 있는 간판을 모두 바꾸고 있는 것. 중국은 백두산 관리권이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창바이산보호개발관리위원회로 넘어온 만큼 이제는 한글을 병기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백두산 자락은 조선족이 30∼65%에 이를 정도로 한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따라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규정되면서 고조선시대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한민족의 활동공간이었던 백두산의 주류세력도 한민족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그 대신 백두산을 만주족과 한족의 역사무대로 장식하려는 연구는 활발해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백두산 주변 시와 현은 다투어 창바이산문화연구회를 조직했다. 올해 6월 초엔 창춘(長春)에 창바이산문화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문화박물관에 걸려 있는 백두산 산신령은 만주족의 산신령이다.

○ 겉과 속 다른 백두산 공정

중국 정부가 드러내 놓고 추진했던 동북공정과는 달리 백두산 공정은 실체를 찾기가 쉽지 않을 만큼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정부나 백두산 관련 기관의 공식 문헌을 아무리 찾아봐도 ‘백두산(또는 창바이 산) 공정’이란 용어 자체가 없다. 동북공정의 후유증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한민족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은 매우 치밀하고도 총체적이다.

먼저 백두산에 대한 소개부터가 다르다. 남북한은 주봉을 병사봉(장군봉)으로 치지만 2004년 지린 성의 창바이산관리국이 출간한 ‘중화명산 창바이 산’에는 주봉을 백운봉(白雲峰)이라고 써놓았다. 해발 2744m(북한 주장 2750m, 중국 주장 2749.5m)인 병사봉은 백두산 최고봉으로 북한에 있다. 반면 해발 2691m인 백운봉은 중국에 있다.

백두산의 역사와 문화 왜곡은 더욱 노골적이다. 남북한은 백두산을 한민족의 발상지로 고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민족의 역사무대로 여기지만 중국은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로 중국 동북지역의 다양한 소수민족 정권이 활동한 무대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백두산에서의 한민족 역사를 19세기 중엽 이후의 간도개척사만을 인정한다.

○ 개혁개방 이후 백두산 중시

당초 백두산을 중시하지 않던 중국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집권 기간 내내 백두산을 찾지 않은 마오쩌둥(毛澤東)과는 달리 덩샤오핑(鄧小平)은 1983년 8월 백두산에 올라 ‘長白山(장백산)’과 ‘天池(천지)’라는 휘호를 남겼다. 그의 휘호는 현재 북쪽 등산로 입구와 천지의 비석에 새겨져 있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1995년에, 후진타오(胡錦濤) 현 주석은 지난해 백두산을 찾았다.

“백두산엔 문화가 없다”며 백두산을 경시했던 학자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1994년 백두산 자락의 바이산(白山) 시가 처음 주최한 제1차 전국창바이산문화연구토론회는 점차 발전을 거듭해 2000년 10월 지린 성 차원의 ‘창바이산문화연구회’로 정식 출범했다. 문학예술 역사 고고 관광 등 다양한 각계 인사 및 학자 220여 명이 참여하는 매머드 학술단체다. 매년 출간되는 연구 논문만 60여 편으로 중국의 ‘백두산 공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한다.

○ 백두산 영원히 잃을 수도

이미 중국 정부는 2008년 백두산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에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현지에서는 중국이 백두산을 자연유산이 아니라 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오고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백두산 종합개발의 총책임자인 스궈샹(石國祥) 창바이산보호관리위원회의 당서기 겸 주임 등이 “창바이 산을 자연문화유산으로 등록할 것”이라고 사석에서 자주 강조했다는 것.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중국이 백두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서 한민족 색채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총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며 “철저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中, 역사 왜곡” 메아리없는 외침

백두산에서 한민족을 떼어내려는 ‘백두산 공정’에 대해 중국의 조선족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

백두산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조선족 학자들은 현재 중국의 백두산 개발과 문화연구에서 대부분 소외된 상태다.

그러나 이들의 학문적 입장은 확고하다. 백두산은 한민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버지 환웅(桓雄)이 3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이며,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첫 도읍지가 모두 백두산 자락이라는 것.

또 중국이 고구려를 9개의 다민족 국가로 규정하면서 한민족은 그중에서도 ‘지배적 다수’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를 한민족의 역사에서 분리하려는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발해 역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연합 국가이긴 하지만 당시 선진 문화를 이루었던 고구려의 정체성을 그대로 계승한 국가라는 것.

특히 조선족들이 19세기 중엽 이후 들어가 황무지를 개척한 간도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현장도 모두 백두산 자락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이름이나 신분을 드러내길 꺼렸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실명이 거론될 경우 불이익을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한국 정부나 학자들에게 감정적인 정치적 대응을 자제해 줄 것을 주문했다. 연변대의 한 조선족 학자는 “한민족 문화는 백두산과 절대 갈라놓을 수 없는 문화”라며 “역사적 근거를 갖고 얘기하면 중국 정부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 하종대 특파원 2006-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