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이 정말 북한에 뒤질까

‘북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는 작통권 논쟁의 숨은 시발점이자 최대의 미스터리…
우리가 우위라고 하면 국방예산 삭감과 군 축소의 논리로 이어질까 하는 불안감

“서주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략기획실장은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국방연구원에 연구용역을 맡긴다. 남북군사력 비교가 주제였다. 객관성 있는 남북 군사력 비교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는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 남한이 육군은 북한의 80%, 해군은 90%, 공군은 103% 수준으로 전체적으로 봤을 때 군사력에서 열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애당초 제대로 된 보고서가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사사건건 연구에 개입했다.

국방연구원은 국방부 산하기관인지라 다른 생각을 내놓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육·해·공군 등 각 군도 난리였다. 보고서는 국방연구원과 청와대를 몇 번이나 왔다갔다 했지만 과거 국방부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차를 비교하면서 50년대 생산돼 퇴물로 전락한 북한의 T-40, T-50 기종이 남한의 최첨단 전차인 K1(88전차)의 0.8~0.9 정도로까지 높게 가중치를 부여했다. 남한이 절대우위를 점한 C4I(전술지휘통제) 등 정보전력에 대한 평가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겸손한, 너무 겸손한 국방부

2년 전의 일이다. 여러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2004년 8월 언론을 통해 알려진 국방연구원의 남북한 군사력지수 비교 보고서가 나오는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북한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남한을 ‘과소평가’하는 원심분리기로 결과물이 추출됐다. 이어지는 논리들은 뻔했다. 보수언론들은 “남한 군사력의 여전한 열세”라고 떠들었고, 군은 “첨단무기 도입을 통한 군사력 강화”를 외쳤다. 한 정부 관계자는 “국방부가 너무 겸손했다”고 말했다. 안보에 이상이 없다며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할 국방부가 남한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함택영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와 서재정 코넬대 교수는 ‘북한의 군사력 및 남북한 군사력 균형’이란 논문에서 “당국의 북한 군사력 평가에는 정책적 의도 때문에 내재적 편향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편향은 남한이 북한보다 우위라고 하게 되면 국방예산 삭감, 군 축소의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작용한다.

북한의 군사력 우위는 전시 작전통제권(이하 작통권) 환수로 뜨겁게 달아오른 2006년 여름, 잘 보이지 않는 논쟁의 시발점이다. 작통권 환수를 반대하는 쪽은 남한의 군사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작통권을 가져오면 주한미군이 떠나거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국방부는 이들을 달래면서도 앞으로 군사력 증강을 통해 작통권 환수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화답한다. 언뜻 양쪽의 입장이 달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군사력 강화란 대목에서 이해가 일치한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 군이 북한 군보다 우위라고 하면 주한미군이 필요 없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북한 군사력 우위는 주한미군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말했다. 비단 작통권 환수뿐만 아니라 안보와 한반도가 평화 체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남북한 군사력 비교는 짚고 넘어가야 할 우선 과제다.

수십 년 동안 군을 통해 홍보된 북한의 군사력 우위는 현실일까 아니면 신화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전국 성인남녀 205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주한미군을 제외한 한국군만의 군사력과 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응답자의 40.5%가 북한이 앞선다고 답했다. 한국군이 앞서고 있다는 응답은 28.7%로 상대적으로 적었고, 비슷하다는 응답은 25%였다. 특히 40~50대는 북한군이 한국군보다 군사력이 우위에 있다고 봤다. 함택영 교수는 다수의 국민들이 믿는 북한의 군사력 우위는 “잘못된 신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남북 군사력 평가를 구체적으로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8년 전을 돌아보자. 국방부는 1988년 펴낸 <국방백서>에서 미 육군의 개념분석국(CAA)에서 개발한 전력지수 비교방법론을 활용해 한국군의 재래식 전력지수가 북한의 65%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리영희 선생은 같은 해 민간 영역에서 최초로 실증적·분석적으로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연구했다. 리 선생은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란 논문을 통해 주한미군과 핵을 뺀 상태에서 종합적으로 남북한의 군사력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리 교수는 “인적 자원 및 동원력, 장기전을 뒷받침할 경제력(GNP), 경제구조적 동원력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전쟁수행 능력을 고려하면 남한이 북한보다 월등이 앞선다”고 밝혔다. 이에 영향을 받았던지 2년 뒤 나온 <국방백서>에서 “남북한 군사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해볼 때, 전쟁수행 잠재력 면에서는 한국이 우세하지만, 동원군사력 면에서는 남북한이 대체로 대등하고, 상비 군사력 면에서는 북한이 우세하다. 한국의 군력 신장 추세로 볼 때 적정 국방비가 확보된다면 대북 균형전력 확보는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는 의미 있는 대목도 발견할 수 있다.

‘적 최대평가, 아방 최하평가’

리 선생은 1990년 <반세기의 신화>라는 책에서 한-미 당국자들의 북한 군사력 우위 평가의 ‘속임수’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90년 <국방백서>에서는 88년부터 2년 동안 남한의 탱크와 장갑차가 한 대도 늘지 않고 야포만 200문이 늘어난 것으로 돼 있고 북한만 그사이 전차와 장갑차가 각각 수백 대, 야포는 수천 문이 늘어났다고 집계한 것을 찾아냈다. 실제 남한은 그사이 국방비중 전력투자비로만 5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는데도(2004년 <국방백서>), 눈에 띌 만한 무기들이 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한에 비해 수적으로 우위를 보인 북한 항공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MIG-17형이 한국전쟁 당시의 고물이고, 1955년부터 도입한 MIG-19기가 노후화된 것 등을 따질 때 종합적인 공군 능력이 북한보다 남한이 훨씬 우위에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가 군사비 소요액을 국회에 요청할 때 소련의 군사비 비율을 상향 평가하고 미국을 하향 평가하는 식의 ‘소련 군사력의 우위’ 위협을 강조하는 방식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산출 방식을 가리켜 ‘적 최대평가, 아방 최하평가’ 방식이라고 한다. 당국자들도 이러한 논리에 빠져 있지 않냐는 지적이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국방부는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전력투자비로만 무려 80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2003년 북한은 총예산 112억달러 가운데 50억달러(북한 공식발표 17억7천만달러)를 국방비로 쓰고 있다. 북한의 전체 예산이 같은 시기 남한의 국방비(17조5148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남한의 경제규모는 북한과 30배 이상 차이가 난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2006년 6월 기준으로 한 대북 억제능력을 평가한 비공개 자료에서 지상군은 북한의 101%, 해군은 94%, 지상군은 80%라고 소개하고 있다. 2004년 국방연구원의 연구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앞서 임종인 의원은 “국방부 최대의 미스터리가 바로 우리 군 전력에 대한 설명이다. 국방부는 1980년대에도 1990년대에도 우리 군 전력이 북한군에 비해 (전체) 80%라고 밝혔고 지금도 육군 80%, 해군 90%, 공군 103% 수준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1975년부터 군비증강에 투입된 68조원은 어디로 간 것이냐”고 말했다.

리 교수에 이어 2006년 함택영·서재정 교수는 남북한 군사자본재 비교방법을 활용해 북한 우위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그리고 인적·물적·조직적 요소비용의 총합을 반영하고 여기에 군사원조와 감가상각 등을 포함한 군사투자비누계(군사자본재재고)란 더욱 객관적인 방식을 이용했다.

그 결과 정부의 주장과 달리 1980년대부터 남한이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시작했고 그 격차는 점차 벌어진다고 봤다. 실제 국제전략연구소(IISS)는 1983년 이미 남한의 국방비가 44억달러로 북한(19억달러)보다 훨씬 많다고 평가했다. 1999년을 기준으로 남한은 북한에 비해 203~331%의 전쟁수행 능력 우위를 보인다고 밝혔다.

남북 군사력 비교는 판단하는 주체와 방식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 문제는 정부에서 제시하는 수치가 폐쇄적인 공간에서 어떤 과정과 방법을 밟아 생산되는지 검증할 길이 꽉 막혀 있다는 점이다. 군사기밀이란 벽으로 민간과의 소통은 차단된다. 김홍일 의원실은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군사력 비교는 실제 국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는 내용으로 단지 추측을 하는 부분이며, 이 부분에 대해 관계기관에서 일정 부분 공개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안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군이 밖에서 검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다고 얘기한다. 북쪽의 현존하는 위협과 군사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겠지만 과대평가하는 것 또한 위험할 수 있다. 과대평가는 군비증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북한 미사일 개발은 군비증강의 역효과

출구 없는 군비증강은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어느 한쪽의 군비증강은 다른 한쪽의 군비증강을 유도한다. 함 교수는 “1990년대 들어서자 북한은 재래식 전력으로는 남한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되었고, 더 저렴한 대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권 타격을 노리는 장거리포대는 물론 대량살상무기의 장거리 운반수단인 미사일을 개발함으로써 재래식 및 비재래식 억지능력 확보에 힘을 기울여왔다”고 말한다. 북한은 군사력 균형을 위해 비대칭적 부분에서라도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정 군사력에 좌표 설정이 우선돼야 한다. 국방부는 북을 선제공격하는 작전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 기본적으로 북한의 위협과 공격에 대한 억지력이 목표다. 그러나 적정 군사력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군비증강 논리와 요구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가 될 수 있다. 리영희 선생은 일찍이 “현재의 군사력을 균형적으로 감축하는 길만이 전쟁 방지와 무모한 자원 낭비를 예방하는 것임이 너무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겨레21 / 류이근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2006-8-29) 


‘자주국방’ 2년, ‘지도국방’ 56년

한-미 군사동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작통권 변화의 역사…
1950년 맥아더에게 넘겨준 뒤 1994년 12월 평시 작통권 회복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도적 역할에서 지원적 역할로 변경돼가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역할을 담당할 체제를 갖추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우리는 40여 년간 소수의 미군에게 60만 이상의 한국군의 전·평시 작전통제권을 맡겨왔으며, 주한미군의 감축·역할 변경과 함께 주권국가로서의 작전권 문제를 논의할 때가 온 겁니다….”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

1990년 3월8일 제148회 국회 국방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 ‘국군조직법 개정안’을 회기 안에 통과시켜야 할 사유를 묻는 질문에 이상훈 당시 국방장관이 답변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다. 이랬던 이 전 장관이 16년여 뒤 어떤 이유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최근 동료 전직 국방장관들과 군 원로를 두루 모아 전시 작전통제권(이하 작통권) ‘단독행사’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작통권의 역사는 한-미 군사동맹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미 군정을 거쳐 군 조직을 정비한 우리 정부는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을 앞두고 미 군정 총사령관인 하지 중장에게서 한국군 지휘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한국군의 독자적 작통권 행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창설된 지 2년도 채 안 된 가난한 나라의 군대는 스스로 작통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가 유엔군 사령부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음에 비춰 본인은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육·해·공군의 모든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군 지휘권을 이양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군은 작통권을 환수하지 못했다. 1953년 8월3일 이승만-덜레스(당시 미 국무장관) 공동성명으로 유엔사의 작전권이 계속 인정했고, 1954년 11월 한-미 상호방위조약 부속 합의서에서 이를 ‘재확인’한 탓이다.

1961년 5·16 쿠데타 가담을 위해 한국군 일부 부대가 멋대로 이동한 것을 두고 유엔사와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유엔사령관의 작통권 행사 범위를 “공산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도 했다. 이어 1965년 6월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파월 한국군의 지휘권을 우리 정부에서 임명한 한국군 사령관이 행사하기도 했다.

1968년 1·21 사태와 미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은 또 한 차례 작통권 변화를 불러왔다. 두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독자적인 대(간첩)침투 작전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됐고, 1968년 4월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침투작전에 대해선 작통권을 한국이 행사하게 됐다.

1970년대 들어 ‘닉슨 독트린’에 따른 미군 철수계획이 발표되면서 이듬해 3월까지 주한미군 7사단 병력 2만 명이 이에 따라 철수하기도 했지만 한-미 두 나라는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개최에 합의했다. 또 ‘데탕트’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1977년엔 카터 행정부가 다시 철군 계획을 들고 나왔지만, 미 의회와 군부가 남북한 군사력 재평가 작업을 벌이면서 철군 계획은 수정을 거쳐 중단됐다.

냉전 종식의 충격이 준 극적 변화

한편 현행 한-미 연합방위 체제의 주체인 한-미 연합군사령부는 1977년 7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SCM에서 한-미 군사위원회(MC) 설치에 합의한 데서 유래한다. 이듬해 7월 말 열린 1차 한-미 군사위원회의 ‘전략지시’ 1호에 따라 같은 해 11월 한미연합사가 창설된 것이다. 이로써 한미연합사령관에게 한국 방어 책임이 맡겨졌고, 유엔사가 행사하던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은 연합사가 승계하게 됐다.

80년대 말부터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재차 거론되면서 ‘한국 방위의 한국화’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1987년 대선에선 집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용산기지 이전과 작통권 환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어 1991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했고, 1992년엔 미군 장성이 맡아오던 지상 구성군 사령관직도 한국군에 이관됐다. 냉전 종식의 충격이 한-미 관계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같은 시기 냉전 종식에 따른 해외 주둔 미군 규모의 축소 요구가 들끊으면서 1989년 7월 민주당 샘 넌 의원과 공화당 존 워너 의원이 공동으로 제출한 ‘넌-워너 법안’이 제출됐다. 법안에 따라 미 국방부는 미국의 동아태 전략과 주한미군의 역할·임무·성격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작업에 들어갔고, 그 결과로 1990년 4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구상’(EASI)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3단계로 주한미군 재조정안을 제시했는데, 연합사 지상구성군사령관 한국군 장성 임명과 작통권 환수 문제도 여기에 포함됐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군의 지역적 역할’(전략적 유연성)도 이때 이미 제기된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1992년 10월 열린 한-미 SCM에선 연합사에 위임돼 있는 국군의 작통권 중 평시 작통권을 오는 94년 말까지 한국에 둘려준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넌-워너 계획은 1993년 북한의 핵 개발과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빚어진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중단됐다.

1994년 12월1일 한국은 한-미 군사위원회 전략지침 2호에 따라 해방 이후 처음으로 자국군에 대한 (평시) 작통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경계임무 및 해·공군의 초계활동 등 일상적인 작전활동과 부대 이동, 군사대비 태세, 3군 합동 전술훈련 등 작전적 조치들도 연합사와 협조 절차 없이 독자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연합권한위임사항’(CODA) 6개항을 포함한 평시 작통권 환수의 한계는 명확했다.

애초 90년대 말로 예정됐던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가 급물살을 탄 것은 노무현 정부 들어서다. 9·11 동시테러 이후 미군의 ‘신속기동군화’를 기치로 해외 주둔 미군 재배치 계획(GPR)을 추진하던 미국은 노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미군의 ‘지역적 역할’을 거론하면서 주한미군 재편에 시동을 걸었다. 이어 용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잇따라 협상 의제로 제시하는 등 한-미 군사동맹 재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북핵 문제로 갈 길이 바쁜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주한미군 없는 미래, 얼마나 준비돼 있나

2003년 초반 시작된 미래 한-미 동맹 정책구상회의(FOTA)에선 일찌감치 작통권 환수 문제가 제기됐지만, 12차례나 회의가 열리는 동안 심도 있는 논의를 벌이지 못했다. 결국 2005년 9월 한-미 안보정책구상(SPI) 회의에서 논의가 본격 시작됐고, 같은 해 10월 열린 제37차 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한-미 양쪽은 작통권에 관한 논의를 ‘적절히 가속화’하자는 데 합의하면서 작통권 환수 논의가 시작됐다.

한-미 군사동맹의 지난 역사는 주한미군 지위·역할 변경이 철저히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헌법 제5조 2항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국군의 사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군은 태생적으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반세기 이상 이어져온 동맹질서의 근본적 재편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 주한미군이라는 ‘상수’가 없는 미래에 대해 얼마나 준비돼 있는가? 작통권 환수로 헌법이 부여한 자주국방의 의무에 한발 다가선 군이 가져야 할 ‘존재론적’ 질문이다.

(한겨레21 / 정인환 기자 2006-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