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태 “民生무능 참회” 제3의길 찾는 투사 “민주개혁세력이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무능했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이 지난 24일 시민사회단체와의 ‘뉴딜(사회적 타협)’
간담회에서 “민주주의는 진전을 이뤄냈을지 모르나 잃어버린 10년, 활력을 잃은 10년이었다”며 던진 말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대해
송두리째 ‘무능의 굴레’를 씌운 것이다.
김의장의 ‘변신’이 올 여름 뉴스와 화제를 잇고 있다. 재계를 향해 ‘대사면’과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카드를 꺼내며 시작된 뉴딜은 그의
정치행보에서 최대의 격류(激流)로 묘사된다. 민청련 의장을 뿌리로 한 민주세력의 상징성부터, 정계입문 후에도 줄곧 재야파 리더로 매김해온 그의
인생궤적에서는 파격이자 정치적 승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의장의 어법도 단호해졌다. “이대로 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뉴딜에 참여하지 말라”(지난 22일 당직자 조회), “시민단체도 10년을
되돌아보면 비전과 대안을 의미있게 만들었다는 평가는 못 받을 것이다”(24일 간담회)가 대표적이다. 싫은 소리는 돌려 말하고, 열 번을 곱씹어
말하는 게 밴 ‘햄릿 김근태’가 직설적으로 토한 민주세력 참회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김의장의 변신은 지난 6월 초 당의장 취임 후 속도와 폭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5·31 지방선거 참패는 정치적 탄핵이자
천둥소리였다”며 “민주화 세력이라는 것을 더이상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은 밥이 하늘이고, (바둑에서도) 급한 곳부터
두라는 말이 있다”며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몰입을 선언한 시점이다. 수도권 규제 완화와 출총제 폐지를 반대했던 그가 “모든 정책은 서민경제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판단하겠다”며 실용노선을 시사한 시점이지만, 지방선거 패인을 ‘민생 악화’로 집약한 당에서는 박수를 받았다.
누구도 토달지 않던 서민경제 행보가 첫 ‘고비’를 맞은 것은 지난달 29일 대한상의를 찾아 시작한 뉴딜 선언부터다.
재계·노동계·시민단체까지 순례했지만, 엇갈린 요구만 쌓이고 열매는 익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적 대협약’은 당의장 취임 전부터 절차탁마해온 그의 지론이다. 김의장은 지난 5월4일 대한상의 초청 특강때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위해 사회적 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발독재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가자’는 뜻을 공개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사회적 타협론은 그가 2·18 전대에서 패한 뒤 ‘당 2인자’ 행보 속에서 완성했다는 게 참모들의 전언이다. 고은 시인의 시집에서 따
‘만인보(萬人譜)’라는 이름을 붙였듯 각계 인사들과 만나며 집약시킨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의장 취임 후 꺼내든 뉴딜은 횡보 중이다. 김의장이 “통 크게 해보겠다”며 꺼내든 재벌들의 8·15 대사면 건의가 불발됐고,
출총제 해법도 당·정·청의 생각이 벌어져 있다. 4대 재벌총수와의 만남이 “당·정간 의견조율을 더 지켜보겠다”는 반응과 함께 무산됐고, 현재
농성 중인 민주노총 지도부와의 만남도 연기됐다. 그의 시련도 뉴딜 자체보다는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친재벌’ 행보로 보고, 당내 공식합의가 없었던
대사면과 출총제 폐지로 첫 단추를 끼운 역풍 성격이 짙다.
김의장은 그러나 참모들조차 “아슬아슬하다”고 보는 뉴딜을 멈출 태세가 아니다. 시민단체 간담회 때도 “혼날 각오로 왔다”며 한자락 깔고
시작해, “비판적 협력자가 돼달라”고 매듭지었다. 한 핵심참모는 “김의장은 위기의식이 커지면 초조감보다는 오히려 진중해지고 빨라지는 성격”이라며
“이번에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부메랑’도 될 수 있는 이 길을 왜 고집할까. 스스로는 민주개혁세력의 위기론으로 집약한다. “지금 이 상황이 나(김의장)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는 게 참모의 전언이고, 전당대회 때는 경쟁하며 감정의 증폭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 아니라고 한다. 그는 2·18
전대를 뛰며 “5·31 지방선거에서 패하면 민주세력이 쓰나미처럼 밀릴 수 있다”며 고건 전 총리를 만나고, ‘대연합군론’을 불 지폈다. 7·26
재·보선 완패 후 뉴딜을 시작하며 사석에선 “역(逆) 정권교체 기운이 높아졌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질적 변화도 읽힌다. 그 스스로 민주세력 위기의 중심을 ‘세력분열’(전대 때)에서 ‘무능’(지방선거 후)으로 옮기고, 변화의
출발점을 뉴딜로 잡은 셈이다. 재야 이미지의 탈색을 주목하는 일각의 시선은 지나치는 쪽이다. 김의장이 정계개편 의지를 묻는 계보 의원들에게
“시급한 것은 대선 로드맵보다 서민경제 로드맵”이라고 교통정리하는 것도 이 맥락이다.
그가 보는 위기론은 더 근본적이다. 김의장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길을 나섰는데, 바뀐 것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 자업자득이고
잘난 체하고 오만했다”고 민주세력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일정한 ‘주주’ 역할을 해온 스스로의 자기부정이자 참회의
성격도 크다. 다만 민주세력의 리더격인 그가 ‘모두 변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위기론을 점화시키는 데 적임자라는 판단을 했음직하다.
관심은 시련과 도전의 두 길을 걷는 김의장의 귀착지다. 김의장은 당의장 취임 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내적 에너지가
고갈됐다”고 일갈했다. “청와대와 당은 강조점과 시선, 시간표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지금은 “국민의 눈높이와 명령만 좇겠다”며 더
매섭다. 뉴딜에 소극적인 청와대와 정부를 향해서도 ‘마이웨이’의 뜻을 분명히 표출한 상태다.
당·청간 긴장은 계속 차오르는 기류다. 김병준·문재인 파고를 넘은 인사 갈등은 “인사권 존중” “민심수렴”의 간극이 커 확대진행형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김의장이 “약자에게 무자비한 소(小)미국화엔 반대한다”고 밝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부터 분양원가 공개, 출총제,
사학법, 이라크 파병 철군 문제도 당이 주도하겠다고 벼르는 현안들이다. 향후 정계개편도 김의장은 “개혁신당보다는 통합신당”이라며 창당 초심을
강조하는 청와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김의장이 “콜럼버스가 달걀을 깬 결단을 이제는 우리가 해야 한다”며 시작한 뉴딜은 그에게 정치적 ‘늪’과 ‘발판’이 될 수 있는
두 얼굴의 승부처인 셈이다.
(경향신문 / 이기수 기자 2006-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