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신제국주의를 막는 길은 민족주의뿐이다”

작가 조정래 씨는 24일 서울 중학동 한국일보사 강당에서 열린 민족문제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최근 민족주의를 놓고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높은데, 과거 약소민족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 민족주의 밖에 없었듯 ‘신제국주의’ 시대인 지금 (약소국인) 우리의 방어책 역시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최근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을 놓고 반대론자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반면, 찬성론자들은 “세계화를 신제국주의로 매도하는 반대론자야말로 구시대적 민족주의자”라고 반박하는 상황.

조 씨는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세계화 찬성론자)이야말로 지금 (국민을) 속이고 있다”며 “그들의 주장은 (신제국주의 실현을 위해) 약소국의 국민들을 무장해제 시키려는 미국 등의 논리와 하등 다를 바 없는데, 이는 우리 역사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신제국주의의 나라로 유학 가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만을 암기해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거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식의 공격적이면서도 폐쇄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민족주의와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엄연히 다르다”고 강조하며 “우리와 같은 약소국의 민족주의는 더불어 살자는 공생적, 개발적, 방어적 민족주의”라고 규정했다.

▲ 소설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 ⓒ2006데일리서프라이즈 김세옥 기자 

아픔의 역사 되풀이 않으려면 제대로 된 역사교육과 상처의 세계화 필요

조정래 씨는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6개국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4개국들이 100년 전 한반도를 침탈한 열강들과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 씨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 중 어느 나라도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지금 우리가 과거 선조들이 피 흘렸던 아픈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의 소설 <아리랑>에 나타난 수난의 시대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경계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조정래 씨는 우선 “반쪽짜리 역사가 아닌 제대로 된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단 이후 남북의 정권은 모두 똑같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역사를 굴절·왜곡시켜왔다. 단적인 예로, 여기 있는 분들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이 떠오르나. 대부분이 김좌진 장군만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는 50점짜리 답변이다. 반대로 북에선 홍범도만을 떠올릴 것이다. 이 역시 50점짜리 답변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남쪽에선 홍범도 장군이 사회주의자라고, 북쪽에선 김좌진 장군이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로 제대로 역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반쪽밖에 못 보는 애꾸눈을 만든 것이다. 역사란 무릇 진실을 기록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얼마가 걸릴 진 모르지만 반드시 올 통일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행위를 자행한 남북한 정권을 향해 ‘민족반역집단’이라 이름붙일 것이다.”


조 씨는 마찬가지 맥락에서 지금 시대를 사는 작가들이 일제시대 선조들이 겪었던 수모와 아픔 등을 직시하고 그를 작품으로 알려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씨는 소설 <아리랑>을 연재할 당시, 작품 속에 생생히 묘사된 일제의 조선인 수탈·학살의 장면들을 보고 일부 독자들이 ‘이렇게까지 잔인한 내용들을 쓸 필요가 있냐’고 항의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역사적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덧내 쓰라리게 해서 그것을 제대로 기억해야만 치욕의 역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5년 전 <아리랑>이 7년여 동안의 번역 기간을 걸쳐 프랑스에 출판됐는데, 번역된 소설을 읽은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이런 역사를 우리가 모를 수 있었는가. 첫 번째 책임은 일본의 말만 믿은 우리의 잘못이고, 두 번째는 일본으로 인해 겪은 아픔의 역사를 알려내지 않은 한국 작가들의 책임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반면 유대인 작가들은 저마다의 소설과 시 등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세계화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세계는 독일로 하여금 과거를 반성토록 만들었고, 현재 이스라엘이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들의) 팔레스타인을 되찾겠단 주장을 승인한 것”이라고 비교, 설명했다.

이어 “역사는 지나간 세월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인 만큼, 역사의 교훈과 경험을 망각·도외시하면 그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고 거듭 힘주어 말했다.

“반미(反美)란 용어 대신 ‘비미(非美)’란 말 사용해야”

조정래 씨는 지정학적 위치상 한반도는 끝없이 외침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이 한반도는 5000년 역사 동안 1000번이나 외침을 당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조 씨는 “대운하를 파서 압록강과 백록강을 잘라 성을 만들면 모를까 중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온 지금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면서 “과거보다 더한 위협 속에 놓인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민족의 힘으로 뭉치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던 엘살바도르 군부정권의 횡포를 기록한 80년대 말의 남미영화 ‘로메로’를 언급하며 “그 영화 말미 ‘그들(엘살바도르인)은 단결하지 못했기에 7만 명이나 죽어나갔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도 과거 일제 36년 동안 독립투사는 10만 명이었던데 반해 친일파는 150민~160만 명에 육박했고 그 결과 400만 명이나 되는 목숨이 죽어나갔다. 이게 바로 우리의 비극”라고 탄식했다.

이어 “이 같은 아픔의 역사에서 우린 ‘민족의 힘으로 뭉치지 않으면 또 다시 짓밟히는 역사가 올 수도 있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조 씨는 또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해 선별폭격을 할 수도 있다고 공언했는데, 이는 북을 선제공격하겠다는 얘기로 만약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수십년 동안 무장해 온 북한 역시 가만있지 않을 거고, 대한민국은 한순간 불바다가 될 것”이라면서 반전평화운동에의 직접적인 동참을 촉구했다.

그는 “도법스님이 부시 대통령의 선별폭격 발언 직후 반전평화 운동에 나섰다. 그리고 그에 난 한 신문 칼럼에 ‘(한반도 위기가 오면) 지식인들이 앞장서 휴전선으로 가 반전평화 인간띠를 만들고 죽자’고 ‘선동’했다. 왜 그랬을까. 그런 결의가 없으면 이 나라는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정신 차리고 살자”라는 문장을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조 씨는 이날 강연에서 한미 FTA 반대 시위, 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시위 등에서 흔히 사용되는 ‘반미(反美)’란 용어를 ‘비미(非美)’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박정희 시대에 한미 FTA가 추진됐다면 어떤 이도 반대시위를 하지 못했을 텐데, (지난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부터 우리 국민들 사이에선 미국에 대해 올바른 목소리를 내겠다는 저항이 형성됐고 미국도 몹시 당황하는 게 사실”이라며 “이를 두고 일각에선 ‘반미=공산주의=빨갱이’란 논리로 공격하는데, 우리의 비판이 정당하고 미국과의 올바른 관계정립을 말하는 것인 만큼 ‘비미’로 용어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조정래 씨의 이날 강연은 지난 18일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김제시 아리랑 문학관 주최로 한국일보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징게 맹갱 외에 밋들’전과 함께 기획됐다. 내달 3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의 이름인 ‘징게 맹갱 외에 밋들’은 조 씨의 소설 <아리랑>의 주무대였던 전북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인 호남평야를 일컫는 말로, <아리랑>과 관련한 역사 자료들을 재현하고 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 김세옥 기자 200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