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위서 딸 살린 ‘휴대폰 母情’

폭우속 3시간 버틴 인제 최순자씨 구사일생
3m 올라가… 발밑 물 넘실 옆 밤나무 급류에 뿌지직
“딸 집에 보내지 마세요” 담임에 정신없이 전화

어머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늦둥이 외동딸을 떠올렸다. 첫 번째 한 일은 휴대폰 자판을 쏟아지는 빗속에 어림짐작으로 눌러 담임선생님을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우리 딸 집에 보내지 말고 데리고 계세요.”

장맛비가 강원도를 강타한 지난 15일 오전 9시30분쯤. 인제군 덕산리 최순자(50)씨는 “물이 내려온다”는 외침을 들었다. 남편 노동주(53)씨가 막 마을로 나갔을 때였다. 나와 보니 집 오른쪽을 흐르는 개천은 이미 넘쳐 있었다. 급히 집에 들어가 휴대폰만 꺼내 들고 개천 반대쪽으로 피했다. 고개를 들어 산 쪽을 보니 나무가 선 채로 내려오고 있었다. 바위와 흙탕물이 키보다 높게 밀려오는 듯했다.

엉겁결에 집 옆 밤나무로 기어 올라갔다. 어렸을 때 밤도 따고 놀았던 그 밤나무였다. 1m쯤 올라갔는데 발끝까지 물이 올라왔다. 다시 죽을 힘을 다해 3m 가까이 기어 올랐다. 발 아래로는 차와 집이 떠내려갔다. 밀려 내려온 돌과 나무가 밤나무에 부딪쳐 “뿌직”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 외동딸 아랑(14·인제중1년)양이 떠올랐다. 결혼 6년 만에 얻은 보물이었다. 마을에 홍수 난 사실을 모르고 딸이 집에 돌아올까 봐 제 정신이 아니었다.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덕산인데요. 다 휩쓸려 가고 있어요. 우리 아랑이 집에 보내지 말고 데리고 계세요.”

이어 남편에게 전화했으나 받지 않았다. 남편은 무사히 대피해 있었으나, 그때는 휩쓸려 간 줄 알았다고 했다. 퍼붓는 빗속에 휴대폰 자판이 보이지 않았지만, 위치는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최근 걸었던 전화번호를 차례로 눌렀다. 빗소리 탓에 상대방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무조건 “지금 마을 밤나무 꼭대기에 올라와 있다”고 외쳤다.

그렇게 3시간을 버텼다. 손에 힘이 빠져나갔지만, 빗소리 탓에 전화 벨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진동모드로 바꾸었다. 나무는 계속 흔들리고 뿌리가 들썩거렸다. 그때 옆 밤나무가 넘어갔다. 시커먼 물과 바위가 다시 밤나무를 때렸다. 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보고 싶었어요. 시집이라도 보내고 죽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비 좀 그치게 해달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 물을 뚫고 들어온 119구조대원이 최씨를 끌어냈다. 최씨는 체온이 내려가 몸을 심하게 떨었지만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그날 저녁 인제군청 대피소로 옮겨진 최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인제 시내 친구 집에 대피해 있던 딸이었다. 아랑이는 “꼼짝도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뿌리치고 대피소로 달려왔다. 모녀는 그냥 껴안고 한동안 울었다.

사흘이 지난 18일 오전 최씨는 진흙이 50㎝ 이상 들어찬 집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남편의 보청기를 찾는다고 했다. 최씨는 장애인이며, 남편도 청각 언어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최씨는 보청기 대신 아랑이의 백일 사진을 찾아냈다. 최씨는 “우리 아랑이도 커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

(조선일보 / 이혁재 기자, 인턴기자 2006-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