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요, 강제로 지문 찍지 마세요"

▲ 입원중인 병원의 병상에 누워있는 김자현(19)씨. 허리에 통증이 심해 누워서 인터뷰했다. 열손가락에는 알루미늄 캔 뚜껑으로 벤 상처가 손가락마다 각각 열 군데 정도 남아있고, 그 상처에 경찰이 강제로 묻힌 검정 잉크가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2006 문만식
지난 9일 평택 평화대행진 참가자 김자현(19)씨가 경찰에 연행된 상황에서 음료수 병뚜껑으로 열손가락을 베고 이빨로 물어뜯으며 경찰의 지문날인 강요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여경 7~8명을 동원해 김씨의 저항을 제압하고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히는 등 강제날인을 시도했다. 김씨는 그때 입은 외상과 정신적 충격으로 현재 오산 서울병원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다.

경찰, 주민등록증 없어 십지지문 날인 강요

김씨는 지난 9일 새벽 평택미군기지 확장과 한미FTA에 반대하는 평화행진단과 함께 평택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가 연행돼 성남분당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경찰서 무단침입. 훈방이나 즉결심판으로 석방될 경미한 사안이었다. 김씨는 실제 즉심에 넘겨져 10일 자정께 석방됐다.

문제가 터진 대목은 지문날인이었다. 김씨는 열손가락 지문날인을 의무화하는 주민등록증 발급 과정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대체신분증인 여권으로 생활하던 터였다. 그는 경찰에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을 대며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여권으로 신분을 확인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을 근거로 지문날인을 요구했고, 다른 피의자들과 달리 십지지문 날인을 요구했다. 신원확인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김씨에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경찰은 김씨가 꺼내 보여주려 했던 여권을 아예 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여권은 꺼내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함께 연행됐던 피의자들은 모두 오른손 엄지손가락 지문에 검은 잉크를 묻혀 경찰 수사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했다. 피의자가 지문날인을 거부할 경우 경찰이 손쉽게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결국 지문을 채취하고 마는 관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거부해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었다.

김씨에게도 연행된 지 30여 시간 만인 오전 9시께 결국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됐다. 하지만 자현씨는 계속해서 지문날인을 거부했고 경찰은 오후 3시께 끝내 여경 10여 명을 투입해 지문 강제채취를 시도했다.

영장 발부 직후 보호요청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 김창복(49)씨는 조사실 밖으로 끌려 나간 상태였다. 김씨가 다니는 대안학교인 <대안교육 공동체 아침의 집> 교사인 김효숙(37)씨도 김씨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여경 두 명에게 양 팔이 붙들려 의자에 앉혀져 있었다.

김 교사와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여경 7~8명이 김 교사에게 안겨있던 김씨를 강제로 떼어내 또 다른 소파에 앉히고 달려들어 목을 조르고 팔을 꺾으며 오른손 엄지손가락부터 강제날인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손대지 마세요", "싫어요", "안 찍을래요"라고 소리치며 손가락을 물어뜯거나 한손으로 다른 손 손가락을 힘주어 할퀴며 자해했다.

강제 지문 채취 시도하자 자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 교사는 비명을 질렀다. 경찰에게 "아이가 이상해요, 손에서 피가 나요"라며 "의료진을 불러주세요"라고 소리쳤고 굳게 닫힌 조사실 철문 밖에서 비명 소리를 들은 아버지 김창복씨도 함께 절규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경찰의 강제날인 시도는 그 뒤로도 두 시간 가량이나 계속됐고 경찰은 오후 5시가 돼서야 강제날인 시도를 포기하고 김씨를 유치장에 다시 입감시켰다.

김 교사는 "강제채취 시도 와중에 보호자가 불러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도 '손가락에 난 상처가 깊고 이물질이 들어갈 우려가 있어 당장 병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경찰에게 주문했다"고 말했다. 이어 "경찰은 지문을 채취한 뒤 치료받을 수 있다고 했고, 반대로 자현이는 치료받으면 지문을 강제로 찍을 거라며 치료를 거부했다"고 전했다.

아버지 김창복씨는 지문 강제채취 직전 경찰에게 "미성년자인 딸이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한 상태이니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서 다시 해보자"고 사정했다. 실제로 김씨에게 발부된 영장의 유효기간은 16일까지로, 어떻게든 지문을 채취하려 했던 당시 경찰에게도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던 셈이다.

 
▲ 10일 오후 성남분당경찰서에서 지문 강제채취에 저항하다 탈진한 자현씨가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는 아버지에게 안겨있다.
ⓒ2006 지음 (민중언론참세상)
김씨는 "유치장에 다시 들어간 뒤에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손가락과 여경들에게서 입은 온몸의 통증에 대해 병원치료를 호소했지만 약 두 시간 동안 유치장에 방치됐다" 고 말했다. 김씨가 조사실에서 부모님을 만난 것은 그 같은 항의가 있은 뒤였다. 김효숙 교사는 "자현이가 다시 나온 뒤 경찰관들이 바쁘게 움직였는데 석방 서류를 꾸미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자정께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석방돼 용인에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아침 아주대병원에 하루 동안 입원했다가 12일 오전 오산서울병원으로 옮겨 입원했다.

아주대병원측은 "온몸의 멍과 허리를 못 펼 정도의 통증은 갑작스러운 물리력이 가해진 탓"이라며 "오히려 정신적인 충격으로 불안증세가 심해 당분간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밝혔다.

13일 오후 입원치료 중이던 병원에서 기자를 만난 김씨는 "영장이 발부됐다는 얘기를 듣고 의자에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다리로 가리고 아무도 모르게 손가락 지문부위를 알루미늄 병뚜껑으로 조금씩 긁었다"며 "복도에서 여경들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아주 피나게 긁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씨의 열손가락에는 손가락마다 각각 열 번 가량 긁혀 찢긴 상처가 검은 잉크자국과 함께 남아있다. 김씨를 간호하는 동생은 "언니가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른다"고 말했다.

입원중인 병실에서 만난 김씨는 "너무 큰 일이 벌어져서 사람도 많이 찾아오고 해서…"라며 약간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기분을 묻자 그는 "평화행진에 참가했던 건데"라며 "뭔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주장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동생이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나 다른 사람들에게나 제가 겪은 일이 절대로 다시 생기면 안돼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가 겪은 일 다시 생기지 말아야"

김씨는 이번 사건을 겪은 뒤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잠시 침묵한 뒤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옆에서 보고 참가하는 정도였는데 조금 더 저 자신이 주체가 돼서 행동해야겠다는 좀더 강한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편 지문날인반대연대와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서울대책회의 등 12개 단체는 12일 성명을 내고 "수사과정의 인권침해를 철저히 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며 "양심에 따른 지문날인 거부를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또 "불필요한 지문날인제도를 폐지하고 수사과정에서 개인정보수집 절차를 최소화하라"고 요구했다.

지문날인반대연대 활동가 이은희씨는 "지금까지 지문날인 거부자들은 이번과 같은 단순 집회 참여만으로도 일단 연행되면 지문날인을 강요받아왔고, 저항하는 경우 경찰은 손쉽게 압수수색영장을 발부해 강제 집행해왔다"면서 "그러한 불합리한 법률과 관행이 경찰의 맹목성과 반인권성에 결합되면서 이번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터졌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자현씨 사건 조사를 담당한 성남수정경찰서는 분당경찰서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규탄성 의견들이 잇따라 게시되자 13일 해명성 글을 게시했다. 이 글에서 경찰은 "(자현씨가) 진술한 인적사항 이외에 이를 뒷받침 할만한 신분증 등 자료가 없어 대상자의 십지지문에 대한 압수수색검증영장을 신청, 발부받아 여경들이 영장을 집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검증은 강제처분으로써 지문채취를 위해 법관으로부터 발부받은 영장에 의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에 근거한 조치"라고 덧붙였다

"신념 지켜 대견, 튼튼하게 다시 일어섰으면..."
[인터뷰] 아버지 김창복씨, "양심에 대한 철저한 각성 있어야"

김자현씨의 아버지 김창복씨는 양심을 끝내 지킨 딸의 행위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딸 사건이) 더 많이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며 우려하기도 했다. 딸이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자신에게 가해진 불의나 부당함을 꿋꿋이 제거해 나가면서 튼튼히 일어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 아버지로서도 큰일을 겪으셨는데요.·
"사람이 너무 드러나거나 표 나지 않고 조용히 제 할 일 하면서 살길 바랐어요. 초등학교 마친 뒤 홈스쿨링을 하고 대안학교에 보낸 것도, 아이가 자신을 볼 수 있고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 아이들에게 어떤 바램을 갖고 계신가요?
"큰일을 하고 많이 알려지고 아는 게 많아서 기쁜 게 아니다, 스스로 조그만 일 속에서도 기쁨을 얻어가며 살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왔고 또 그렇게 말해왔어요."

-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세요?
"적어도 자기 자존심 하나만은 지켜주길 바라왔어요. 비겁하게 살지만은 않아야 한다고 얘기해요.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게 대견스러워요. 그렇지만, 너무 험한 길을 가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무거워요. 자꾸 드러나고 알려지는 것보다 자기 스스로 채워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죠. 조금은 더 넉넉한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더 날카롭게 뾰족한 사람이 되기보다는요."

- 아버지가 보시기에 딸의 상태가 어떤가요?
"처음 입원했던 아주대병원에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면서 정신병동 입원을 권유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신병동에 격리 입원될 것 같았어요. 단기간 어떤 커다란 폭력적 상황에 맞닥뜨리면서 심리적 충격이 컸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입원해 있으면서 자꾸 울기도 하고 금방 화를 많이 내기도 해요. 잘 아는 분들이 찾아오면 명랑하고 밝은데, 혼자 있으면 자꾸 손가락 상처 아물어가는 걸 보면서, 자꾸 뜯어요. 자꾸 뜯어내요. 나으면 다시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병원에서는 2~3주 더 입원해 있으라고 하는데 경과를 봐서 웬만하면 퇴원했으면 해요."

- 그 사건 이후 딸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면.·
"잘못된 관행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나 각성의 계기를 이 일을 통해서 줬다, 그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라고 자신감을 북돋워주고 있어요."

- 이 일을 계기로 든 생각도 많으실 텐데요.
"영장이 발부됐다는 다급한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갔어요. 보호자가 가고 있으니 강제집행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해두고서 여기저기 인권단체나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어요. 강제집행을 막을 현실적이거나 법적인 수단이 있나 물었죠. 지금 집행이 되면 나중에 법적으로 '부당했다'고 결정되더라도 상처는 회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본인이 거부하는데도 영장을 강제집행 하는 게 과연 올바른가 하는 생각을 했죠."

- 결과는 어땠나요?
"어떤 단체나 변호사도, 영장 없는 날인거부는 가능한데 판사의 영장이 있는 날인거부는 불가능하다고 계속 얘기해요.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정도의 조그만 가능성만 있어도 그 가능성을 뚫고 들어가는 게 사회운동 아닌가요? 군사독재나 식민시절에 바로 그렇게 활동했잖아요. 가능성을 연구해보겠으나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하다는 얘긴 할 수 있겠죠. 관성에 젖은 게 아닌가 싶어요. 인간 양심에 대한 아주 철저한 각성이 아니면 그 양심을 지켜내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말씀하셨죠?
"병역거부는 징집영장 거부잖아요. 거부한다고 해서 강제로 집행한다면 끌고 가서 군대에 넣으면 되고 총을 안 들으면 영창에 보내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요. 딸 아이 경우도 그랬어야 해요. 거부에 대한 죄를 물어서 따로 처벌하면 되니까요. 강제로, 폭력적으로 집행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 얘길 계속 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상당히 미온적이었어요. 인권문제나 부정의한 사회에 대한 각성을 조금 더 명료하게 가져야 된단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는 우울해지기도 했어요. 결국 폭력을 써서 강제로 (지문채취를) 하게 되겠구나 싶고,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오는 우울함요."

- 활동가들에 대한 부탁이군요.
"활동가들에게 그런 부분을 부탁하고 싶어요. 부정의를 고치고자 하는 건 그것과 싸우지 않으면 올 아주 조그만 편안함에 대해서도 경계의 마음을 늦추지 않는 거예요. 그때에야 비로소 변화가 생겨나죠. 이 말을 꼭 쓰라는 건 아니에요.

나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딸아이한테서도 이번에 나름대로 배우게 됐어요. 그런 의지와 의식을 가져나갈 수 있는 활동을 해주시길 바라죠. 그것이 되돌아와서 저 애가 어쨌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되겠죠."

(오마이뉴스 / 문만식 기자 2006-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