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면 조국은 누가…”

이라크 지식인들 살해위협속 국가재건 노력

“이라크의 많은 엘리트들은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가.” 이라크에서 종파 갈등과 테러조직의 폭력으로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공포와 긴장 속에 굳건히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이들도 많다. 폭력 피해를 겁낸 이들의 국외 탈출 행렬이 이어지 는 가운데에서도 ‘조국의 재건을 위해’ 바그다드를 지키는 지식인과 주민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27일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에 의해 보도돼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새 국가 출범과 함께 구성된 형사재판소장을 지낸 주하이르 알 말리키는 협박에 시달리면서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미국이 지원하는 새 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뒤 그의 집에는 그를 ‘배신자’라 비난하는 협박 전화와 살해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를 더 괴롭힌 것은 미국 및 새 정부와의 갈등이었다. 지난해 그는 미국이 이라크전 직후 내세웠던 친미파 정치인 아메드 찰라비의 부패 혐의에 대한 재판을 맡아 체포영장을 발부 했다.

그러나 국가 재건자금을 횡령한 찰라비에 대한 재판은 사방의 압력 때문에 공정하게 진행될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살해 위협 속에 말리키는 공직을 그만뒀고, 이라크를 떠나기 위해 유럽에 일자리를 구했다.

비자까지 받아놓고 짐을 챙겼는데 이웃들이 그를 잡았다. “우리가 당신의 보디가드가 되어줄테니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만류에 그는 마음을 바꿨다. “모두가 떠나면 이곳엔 누가 남겠는가.

” 말리키는 올들어서부터는 세제 개혁과 군사법령 정비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의사인 압둘라는 가족을 외국에 피신시키고 혼자 바그다드에 남아 진료를 하고 의대에서 강의를 한다. 가족과 함께 도망치고 싶었지만, 외국에 나가면 이라크의 상황이 떠올라 오히려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의 상황은 2003년 후세인 체제 붕괴 뒤 사람들이 가졌던 희망에 대한 거대한 배신”이라고 진단하면서, “그러나 내 전 때 나라를 떠나버린 레바논인들처럼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라크 지식인들이 처한 현실은 참혹하다. 사담 후세인의 변호를 맡았던 카미스 알 우바이디는 조국을 지키는 길을 택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후세인 변호사로 선임된 뒤 그는 CSM 인터뷰에서 “범죄 혐의를 받는 사람을 변호하는 것이 내 직업”이라며 “내 생명은 신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었다. 이후 그의 집 앞에 세워둔 자가용 승용차가 폭파되고 총격을 받는 등 살해 위협이 반복되더니 결국 그는 집 앞에서 살해됐다.

배운 이들이 모두 떠나면 전쟁이 끝나 국가를 다시 세우려 해도 ‘머리’가 없어 재건 작업이 힘겨워진다.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 격렬한 내전을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바로 그런 ‘두뇌 고갈(brain drain)’ 때문에 험로를 걷고 있다.

이라크는 말리키나 압둘라 같은 지식인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는 셈이다. 이라크는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교육열이 높았던 지역이고, 한때 박사학위 소지자 비율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기도 했던 나라다.

이라크의 지식인 엘리트층은 사담 후세인의 폭정을 거치며 숨죽이며 살다가 또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극심한 전쟁 후유증을 고통스럽게 견뎌내고 있다고 CSM은 지적했다.

(문화일보 / 구정은 기자 2006-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