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인간적인 영웅들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박지성은 또래 선수들보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늘 열등감에 시달렸다. 공격 수비 어느 쪽도 잘하지 못했고 1999년 수원공고 졸업 후에는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대학이나 구단이 없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보지 못했던 그는 수원 삼성에 입단했다가 15일 만에 탈퇴하면서 제대로 ‘한’을 품게 된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기량을 향상시킨 그는 거스 히딩크 감독 눈에 띄어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었고 마침내 영국의 명문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스카우트돼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 리거가 됐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가 된 박지성.

현실의 사례뿐만이 아니다. 최근 TV나 영화 등 대중문화상품에서도 어제의 열등생이 오늘의 승자가 되는 이른바 ‘어리버리 영웅’ 상이 인기다.

○ 나약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던 영웅들

월드컵 기간 중에도 일부 시청자가 “방송을 계속하라”고 요구했을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MBC 드라마 ‘주몽’. 주인공 주몽은 초반에 나약하기 그지없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신전의 시녀를 몰래 불러내서 ‘작업’을 걸고 시녀들이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며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날라리였던 것. 이복형들을 따라 전투에 참가해서는 어설프게 칼을 휘두르다가 적군에 의해 칼이 땅에 떨어지는 수모도 당한다. 도끼를 들고 다가오는 적 병사의 서슬에 토끼처럼 눈을 뜨고 덜덜 떨기만 하다가 이복형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

게으르고 나약할 뿐만 아니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고구려의 시조가 될 싹수가 보이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

‘성웅(聖雄)’으로 추앙되던 이순신의 영웅 탄생기도 21세기에는 다르게 그려졌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유년의 이순신은 또래 아이들보다 체력도 담력도 떨어지는 소심한 아이로 그려진다. 동네 아이들이 옆 동네 아이들과 벌이는 싸움판에 끼고 싶어 하지만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담력 테스트에서 결국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포기한다.

나약했던 영웅을 환골탈태하게 만드는 것은 ‘시련’이다. 주몽은 이복형들의 계략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 뒤 무술을 배우면서 영웅 주몽으로 서서히 거듭난다. 이순신도 아버지가 역모 죄로 끌려가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처럼 처음부터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영웅이기는커녕 귀속된 집단의 평균 수준보다 자질이나 품성이 더 떨어지던 인물이 행운이 아니라 시련을 맞아 다시 태어나는 영웅 스토리에 대중은 매료되고 있는 것.

○ 통로 막힌 사회의 탈출구로서의 영웅

주몽을 집필 중인 최완규 작가는 “밑바닥에서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인간 승리의 스토리가 인기를 얻고 있는 점에 착안해 ‘어리버리한 영웅’을 만드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상파 방송들에서 꾸준하게 10%대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논픽션 프로그램인 KBS ‘인간극장’, SBS ‘생활의 달인’ 등이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행적을 다루고 있다.

서강대 전상진 사회학과 교수는 ‘어리버리 영웅 이미지’의 출현을 “한국사회에서 신분 이동의 가능성이 더욱 제한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석한다. “지금은 영웅이지만 과거에는 나처럼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 현재의 영광이 시련을 겪고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데서 ‘처음부터 영웅’의 경우보다 더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 전 교수는 “우리 사회의 계층 구분이 고착화되고 신분 상승의 장벽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박지성 같은 인물에게 느끼는 대리만족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 서정보 기자 2006-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