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박종철군 사망장소 조작 시도했다"

박군 검안의 오연상 교수 19년만에 증언

서울대생 고(故) 박종철군이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진 직후 경찰이 사망 장소를 조작하려고 시도했다는 증언이 사건 발생 19년만에 나왔다.

사건 당시 검안을 맡았던 중앙대 의대 오연상(49) 교수는 6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형사들은 이미 박군이 숨진 상태였음에도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로 시신을 옮기려 했다"고 밝혔다.

중앙대 용산병원에서 전임강사로 근무했던 오 교수는 형사들이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려 했던 것은 `응급실에 들어왔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고 우기려 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형사들이 자꾸 고집을 피우길래 병원에 전화해 `죽은지 최소한 30분 이상 지났다. 절대로 응급실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병원측은 직원들을 동원해 경찰 차량을 막았다"고 회고했다.

경찰은 병원측과 실랑이를 벌이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시신을 경찰병원으로 옮겼다고 오 교수가 전했다.

사건 당일 정오께 병원 응급실장의 호출을 받고 왕진을 갔던 오 교수는 현장 도착 당시 박군의 심장이 이미 멎어 있었으며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강심제를 주사했는데도 소생할 기미가 없어 30분 뒤 사망 진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건 사흘 뒤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았을 때 형사 두 명이 `(고문관련자들이) 아직도 (사건경위에 대해) 얘기를 안 했어? 손 좀 봐야겠구만'하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해 사건 조사 과정에서 물리력이 행사됐을 가능성을 추정케 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박군을 고문했던 경찰관들이 옆 방에서 조사받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방음시설이 철저해 말소리나 비명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오 교수는 사건 당시 물고문 정황을 언론 등에 밝힌 배경과 관련, "워낙 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어서 진실을 말하는 데 부담이 있었지만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확실하게 밝혀서 진술 번복이나 사건 은폐가 불가능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 임화섭 기자 2006-6-6)

[고문치사 박종철 검안의 오연상 교수] “물고문 수사관들 고문당하기도”

오연상 교수는 본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종철군 물고문 치사사건과 관련해 19년간 가슴에 묻어놨던 일부 새로운 사실들을 털어놨다.오교수는 박군 시신을 검안한 최초의 민간인이란 이유 때문에 경찰의 감시와 주변의 협박에 시달렸고 그 이후로 지금껏 입을 굳게 다물고 살았다.

우선 박군을 물고문해 숨지게 한 수사관들도 조사 과정에서 고문당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오 교수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조사를 받을 때 옆방에서는 박군을 물고문했던 수사관들의 비명이 계속됐다고 당시 수사관 말을 인용해 증언했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경찰의 고문이 얼마나 횡행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고 고문 경찰이 고문당하는 웃지 못할 시대상이다.

박군의 시신이 대학병원으로 옮겨질 뻔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당시 경찰은 대공분실에 있던 박군의 시신을 중앙대 병원으로 옮기려 했고 이는 오 교수의 제지와 병원측의 반대로 무산됐다.박군이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사망한 것처럼 조작될 뻔 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오교수의 회고다.박군의 시신은 결국 경찰병원으로 옮겨졌다.

오교수는 박군의 시신을 맨 처음 검안한 민간인이었다.오교수의 생생한 첫 증언은 19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사실은 온통 물바다였고,박종철 군 배에서는 가득찬 물로 인해 꼬르륵 소리가 들렸고 폐에서도 수포 소리가 났다"

당시 오 교수는 물고문을 증언한 이후 경찰의 감시하에 들어갔고 주변의 협박전화에 시달렸다. 병원으로 협박전화가 쏟아졌고 심지어 병원 관계자들도 "죽으려고 환장했냐"고 오 교수를 비난했다. 당시 의사협회 고위 관계자들도 "오 교수가 젊어서 실언했다"고 말하기도 했다.경찰은 수사관들을 붙여 한동안 감시했다.이것이 오랜 세월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배경이다.

이에 대해 박종철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짐작은 했지만 군사정권의 조직적인 은폐와 양심적인 인사에 대한 협박이 난무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 김원철 기자 2006-6-6)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키 170cm 젊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고문치사 박종철 최초 검안의 오연상 교수 인터뷰 “고문치사 증언하고 감시·협박 시달려”

5일 오후 중앙대 의대 오연상(49) 교수와 함께 우리시대 ‘고문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오 교수는 꼭 19년 만의 방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경찰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는 대공분실의 잿빛 건물이 내뿜는 이미지는 여전히 암울했다. 오 교수는 1987년 1월 짧은 시간의 경험이었지만 아직도 생생히 그날의 일들을 기억해냈다.

◇ 19년 만에 다시 찾은 대공분실 = 건물 5층 복도로 향해 있는 철제문을 여는 순간 어둠침침한 통로와 죽 늘어선 16개 조사실의 육중한 철문이 한눈에 들어왔다. 임국빈 인권보호센터장이 “당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설명하며 509호 조사실 문을 열어줬다.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하고 비명에 간 바로 그 장소다.

4.09평 방에는 회색 욕조와 세면대,양변기가 보였다. 한쪽 귀퉁이에는 박군을 취조할 당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개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만한 크기의 침대가 눈에 띄었다. 또 햇빛이 간신히 들어올 만한 작은 창문 옆에는 박종철군의 영정과 그 앞에 조사실을 다녀간 사람들이 놓고간 꽃다발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오 교수는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 맞냐. 당시 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다”고 입을 뗐다. 이어 그는 침대를 가리키며 “여기에 키 170㎝에 몸무게 60㎏의 젊은이가 누워 있었다. 물에서 금방 건져 올린 사람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고 그날을 회고하기 시작했다.

◇ 잊지 못할 그날 = 5공화국 말기였던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45분 쯤. 중앙대 용산병원 전임강사로 있던 오 교수는 응급실장의 긴급 호출을 받았다. 응급실로 내려가 보니 대공분실에서 왔다는 수사관 3명이 간호사 1명과 함께 심폐소생 장비 등을 이미 준비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가 있다. 같이 좀 가셔야겠다”고 말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대공분실로 향하던 중 수사관 한 명이 “(박군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갈증이 난다고 해서 물을 많이 먹였다”고 오 교수에게 설명했다.

대공분실엔 수십명의 수사관들이 정신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509호에 들어서자 팬티만 남기고 발가 벗겨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젊은이 한 명이 보였다. 조사실은 온통 물바다였다. 젊은이 배에서는 가득찬 물로 인해 꼬르륵 소리가 들렸고 폐에서도 수포 소리가 났다.

오 교수는 곧장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심장에 강심제를 주사했다. 그러나 30분간의 노력에도 소생할 기미가 없었다. 오 교수가 “사망했다”고 말하자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높은 분’이 “그러면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서 전기 충격기라도 사용해 보라”고 주문했다. 오 교수는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수사관들은 담요로 시체를 싼 뒤 들것에 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것이 들어가지 않자 그들은 계단을 이용해 뛰어 내려 갔다. 오 교수는 재빨리 1층 사무실로 가 병원에 전화를 걸어 “시체를 병원으로 옮기려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라”고 알렸다.

오 교수는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것 같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것과 병원 응급실에서 사망한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으니까. 진실 규명을 위해, 또 병원의 안전을 위해서도 병원으로 가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수사관들은 중앙대병원측의 제지로 결국 경찰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한 경찰 간부가 오 교수에게 “앞으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그 뒤로 수사관 3명이 오 교수를 따라 다니며 감시했다.

◇ 긴박했던 며칠 = 다음날(15일) 오 교수는 수사관들의 감시 속에 병원에서 진료하던 중 화장실에 갔다가 한 언론사 기자를 만났다. 수사관들은 화장실까지 따라 오지는 않았다. 오 교수는 기자에게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있었다. 박군도 물에 빠진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이어 박종철군이 가혹행위에 의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됐다. 16일 기자들이 몰려왔다. 오 교수는 기자들에게 조사실이 ‘물바다’였음을 수차례 강조, 사실상 물고문이 있었음을 알렸다.

그날 저녁 오 교수는 검찰 수사관들에 끌려가 용산 그레이스호텔(현재 신원빌딩)에서 24시간 조사받았다. 간호사들에 대한 조사도 옆방에서 진행됐다. 그 다음날 밤 12시 오 교수는 집앞에서 경찰 수사관들에게 붙들려 ‘신길산업’ 간판을 건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다시 조사받았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오 교수는 ‘이제 난 끝이구나’는 생각을 했다.

경찰은 검찰이 했듯이 오 교수에게 물고문에 대한 반복된 질문을 계속했다. 당시 옆방에서는 비명 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됐다. 수사관들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박종철군을 수사했던 수사관들이라고 전했다. 오 교수는 “옆방 고문소리를 들으면서 ‘참 이상한 세상이다. 박종철군을 고문해서 죽이고 이번엔 그 수사관들이 고문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꼬박 하루를 조사받고 풀려 났다. 그리고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친구가 운영하는 호텔에 일주일간 도피했다.

(국민일보 / 지호일 기자 200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