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계급의 적이야… 적이야… 적이야…

문화대혁명 40돌, 그 격랑에 떠내려온 어느 중국인 3세대 가족 보고서…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 흘린 할머니에서 소비의 쾌락만을 만끽하는 손녀까지

내 남편은 중국인이다. 어찌하다 보니 중국 남자와 결혼하게 됐고, 지금은 6개월 된 딸아이를 두고 있다. 아이를 낳은 뒤부터는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 고향 후베이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인 시아버지도 이번 여름방학을 끝으로 퇴직한 뒤 베이징으로 합류할 예정이다. 결혼과 함께 나는 ‘뜻밖에도’ 중국인 대가족의 일원이 된 셈이다. 게다가 맏형의 외동딸이자 남편의 조카가 베이징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이라 주말만 되면 우리 집은 갓난쟁이부터 60대 노인까지 3세대가 다 모이게 된다.

회고할 때마다 눈물 쏟아내는 시어머니

대학생 손녀딸이 오는 주말이 되면 시어머니는 금요일 오후부터 ‘행복 모드’로 바뀌기 시작한다. 시장에 나가 이것저것 반찬거리들을 잔뜩 사들고 와서는 저녁 내내 다듬고 씻고 썰면서 주말 가족 만찬을 준비한다.

평소에는 “낭비, 낭비하지 말아라!”를 주문처럼 달고 사는 시어머니가 유일하게 음식을 ‘낭비’하는 것도 바로 주말이다. 시어머니에게 ‘가족’은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한다.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겪은 뒤부터 오로지 믿고 기댈 건 ‘친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올해 65살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막 20대 중반을 향해 가는 한창 나이였다. 당시 고향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재직 중이었다. 지금의 시아버지도 시 교육위에서 주최한 교사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당시의 보통 중국 여성들보다 키가 큰 편인데다, 남자들이 줄줄 따랐을 정도로 ‘한 미모’ 했다고 한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 당시 고향 마을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가장 ‘잘나가는’ 젊은 여교사였다. 문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시어머니의 인생은 그야말로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그 황금시대는 문혁 발발과 함께 ‘암흑시대’로 돌변했다. 문혁 당시 가장 무시무시한 ‘낙인’이었던 ‘계급의 적’으로 찍혔기 때문이다. 시아버지 역시 ‘반동 계급’으로 찍혀 둘은 매일같이 홍위병들에게 끌려다니며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문혁 당시를 회고할 때마다 시어머니는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세 차례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

시어머니가 ‘계급의 적’으로 찍히게 된 건 친척의 밀고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근무하던 학교의 당 지부 서기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아 갔더니, 서기가 냉랭한 표정으로 이렇게 묻더라는 것이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시오? 뭐 찔리는 게 있을 텐데…. 당신은 계급의 적이야!” 시어머니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당 지부 서기와 그 주변에 있던 다른 학교 관계자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시어머니에게 그들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저승사자와도 같았다.

시어머니가 ‘반동계급’으로 찍힌 것은 시어머니의 생부가 ‘해방’ 전 마을의 지주였기 때문이다. 10살이 채 되기 전에 친아버지를 여윈 시어머니는 그 뒤 개가를 한 엄마를 따라 양부 집에서 성장했고, 성도 양부의 성으로 바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사실을 조직에 밀고한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의 친척이었다. 평소에 시어머니를 시샘하고 질투하던 그 친척은 문혁이 일어나자 생부의 ‘과거’를 밀고해서 시어머니를 하룻밤 사이에 ‘계급의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뒤 문혁이 끝날 때까지 시어머니의 인생은 말 그대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당시 시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신처럼 ‘계급의 적’으로 찍힌 다른 사람들 중에는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모욕감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자신의 동료였던 한 남자 교사도 ‘반동계급’으로 찍혀서 홍위병들이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어느 날 그에게 인분을 강제로 먹이며 ‘똥보다 더 더러운 계급’이라는 모욕을 줬다. 다음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매일 살아남자고 되뇌던 시아버지

시아버지 집안 역시 해방 전 마을에서 가장 큰 약국을 경영하던 ‘자산가’ 집안이었던 까닭에 ‘반동계급’으로 몰려 혹독한 고초를 당했다. 시아버지가 당한 고통은 시어머니보다 곱절은 더했다. 시아버지는 당시의 심경을 나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당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었다. 즉, (루쉰이 쓴 소설 <아큐정전>에 나오는) 아큐식의 자기위안 정신이 필요했다. 나는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아직 젊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도 많이 남았다. 아마도 지금 나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가는 밤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낮에는 절대로 나의 고향 사람과 동료, 친구들처럼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온순하게 감옥 안에 엎드려 있어야 하며, 웃는 척하고 고깔모자를 쓰고 홍위병들이 이끄는 대로 길거리 비판장으로 가야 한다. 한마디로 너는 육체적·정신적 고통 그리고 영혼의 고통까지도 감내하며 네 목숨을 붙잡아둬야 한다. 또 시간을 쪼개서 부지런히 공부를 해둬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붉은 계급’이 아니어서 언제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 비바람의 세월이 지나간 뒤 네 인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남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10년 동안 모진 인내의 세월을 보낸 뒤, 그들은 드디어 ‘광명’과도 같은 개혁·개방 시대를 맞았다. 시어머니는 아직도 덩샤오핑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덩이 집권한 뒤부터 자신들과 같은 ‘새끼 지식인’들도 머리를 꼿꼿이 들고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개방 뒤 비록 ‘계급의 적’이라는 낙인에서는 해방됐지만 새로운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돈’이다. 시어머니가 평소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낭비하지 말라’는 것 외에도 ‘부지런히 돈을 모으라’는 것이다. 과거 정치시대의 구호는 ‘계급혁명 만세’였고 오로지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뒤 경제시대에는 ‘돈, 돈, 돈 만세’가 새로운 구호가 됐다는 게 시어머니가 ‘분석’하는 문혁 뒤 40년 중국 사회의 변화를 읽는 ‘열쇳말’이다.

남편은 삼형제 중 막내다. 형제 중에서 ‘가방 끈’이 제일 긴 ‘박사’다. 1971년생인 그는 중국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고 자란 이른바 ‘개혁 세대’다. 하지만 남편은 이 ‘혜택’이라는 말을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 ‘덕’을 본 게 별로 없으며, 오히려 자신들은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어디로 휩쓸려야 할지 모른 채 어리둥절하게 한 시절을 보낸 ‘방황 세대’이거나 혹은 앞세대와 뒷세대, 즉 전통과 변화 사이에 끼인 ‘낀 세대’라고 강변한다. 게다가 개혁·개방 1세대인지라 과도기 개혁정책의 잦은 변화로 매번 우왕좌왕하다 세월을 다 보낸 ‘헛발질 세대’라고도 말한다.

사회주의-자본주의 사이에서 방황한 남편

예를 들어 남편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때까지 배웠던 교육은 이전 세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회주의 만세, 마오 주석 만세” 유의 전통적인 사회주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시장 사회주의’ 교육으로 바뀌면서 사상적인 혼란을 겪어야 했다. 남편 말에 따르자면 도대체 사회주의가 좋다는 건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좋다는 건지 핵심을 종잡을 수 없어서 ‘멍했다’고 한다. 그 ‘멍한’ 상태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남편이 대학에 입학하던 때는 마침 1989년 6·4 톈안먼 사건의 광풍이 막 휩쓸고 간 뒤였다. 그해 9월 대학 신입생이 된 남편에게 대학 4년은 ‘회색빛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톈안먼 사건 뒤 각 대학마다 군사 훈련이 부활되고 사상 교육이 강화돼, 대학은 마치 철조망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이를 남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사고하는 방법마저 억압당한 채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무기력한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자기 또래의 대학생들 내에는 대강 세 부류의 인간형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나는 ‘출국파’로, 톈안먼 사건의 여파로 대학에서 사회에 대한 이상과 열정, 토론이 사라지면서 조용히 개인의 미래 개척에 나선 부류들이다. 즉,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플책을 붙잡고 살면서 유학 준비에만 매진했던 ‘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속칭 ‘마작파’로 불리는 이들이다. 당시에는 수업 외에 달리 해야 할 일도 없고 또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는데, 설령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시간이 남으면 마작이나 카드놀이 등을 하면서 시간을 ‘죽였던’ 부류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자기도 이 ‘마작파’의 열성 당원이었노라고 고백한다.

세 번째 부류는 ‘연애파’다. 이들에 대해선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굳이 한 부류를 덧붙이자면 ‘돈벌이파’(下海派)다. 비록 소수였지만 일찌감치 세상의 변화에 눈을 뜨고 ‘돈벌이의 바다’(下海)에 뛰어든 이들이다. 이 부류에는 주로 톈안먼 사건에 직접 참가했거나 경험했던 윗 학번 선배들이 많았다고 한다. 남편의 해석에 따르면 사회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이상에 대한 좌절을 맛본 이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돈벌이’였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당시 중국에서 펼칠 수 있는 꿈과 이상이 아주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소 대학 구내에 조그만 노점상을 차려서 헌책이나 각종 잡동사니들을 팔았고, 수단이 좋았던 사람들은 일반 학생들이 보기 힘든 외국 영화 등을 구해와서 돈을 받고 상영하거나 대여해주는 ‘장사’를 했다고 한다.

이 네 부류의 인간형들은 지금 중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추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당시의 ‘출국파’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속속 중국으로 돌아와 ‘귀국 유학파’들을 형성하며 중국의 첨단 기술과 지식을 선도해가는 주류 엘리트층이 됐다. 남편이 속했던 ‘마작파’와 ‘연애파’들은 매일 정글 같은 생존경쟁에 허덕이는, 초췌하고 피곤한 소시민 중산층들을 형성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돈벌이파’들은 현재 중국 사회에서 가장 각광받는 사영 기업가 집단으로 변신해 30대 재벌 신화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남편은 지금 자신의 인생 행로에 대해 아주 진지한 ‘변신’을 고려 중이다. 얼마 전 그는 나에게 30대 중반이 되도록 ‘책상머리’만 붙들고 모범답안과 같은 삶을 살아온 지금까지의 인생에 ‘사표’를 던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얼마든지 ‘기회’가 있고 또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란다. 개혁·개방 초기의 흐릿하고 멍한 상태에서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하게 ‘감’이 잡힌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감’ 잡은 시대 변화의 흐름이 ‘돈’이었다면 남편은 그것을 ‘기회’로 보고 있다. 무릇 개혁·개방 이후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바로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게 남편이 내린 최종 결론이다.

명품 쇼핑에 몰두하는 ‘공주 마마님’ 조카

남편의 조카 리첸을 처음 만난 것은 2년 전 여름 그가 고향 후베이에서 베이징으로 막 ‘유학’을 왔을 때다. 맏형의 외동딸이자 중국의 전형적인 독생자녀 세대인 리첸은 1987년생이다. 베이징 기차역에서 처음으로 대면했던 리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함께 온 할머니(시어머니)와 아빠가 짐을 한 보따리씩 이고 지고 메고 있는 반면 ‘젊은’ 리첸은 어깨에 가벼운 소지품 가방 하나만 달랑 멘 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쉴 새 없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고 있었다. 내 조카 같았으면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같으니!’라는 말이 당장 나왔을 법한 상황이지만, 당시 ‘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중에 남편에게 물으니 “우리 형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금쪽같은 딸에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한 적이 없다”는 아주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익히 말로만 들어오던 중국 독생자녀 세대의 ‘견본’을 만난 셈이다.

당시 리첸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는 대학생이 쓰기에는 조금 비싼 고급 기종이었다. 남편에게 듣던 대로 리첸의 수중에 있는 모든 물품들은 하나같이 다 ‘귀하신’ 명품들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리첸을 덮고 있는 옷과 신발, 장식품들만 해도 총 수십만원을 호가했다. 리첸의 아빠는 딸에 관한 일이라면 그 어떤 대가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리첸이 기숙사로 들어간 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의 아빠가 우리에게 내내 당부했던 말은 “아직 어린애나 마찬가지니까 매 주말 불러 이것저것 지도도 해주면서 잘 좀 보살펴달라”는 것이었다. 그 ‘어린애’ 대학생 리첸은 진짜로 지금까지 한 번도 제 손으로 양말 한 짝을 빨아본 적도 없고 밥은 물론 설거지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주말마다 가끔 우리 집에 와서도 그는 시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소파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텔레비전과 휴대전화에만 열중하는 ‘공주 마마님’이다.

그 뒤 한 번 더 놀란 일은, 그의 아빠가 맡긴 리첸의 예금통장 때문이었다. 1년치 용돈이 보관돼 있는 통장에는 놀랍게도 2만위안(약 260만원)이나 들어 있었다. 그 돈이면 중국에서는 대졸 초임 1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시어머니의 계산에 따르면 일반 대학생들이 3~4년 동안 쓸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엄청난’ 용돈을 리첸은 채 반년도 안 돼 거의 다 써버렸다. 주말에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리첸이 하나둘씩 새롭게 구입해오는 최신 디지털 전자제품들과 각종 명품 옷, 가방들을 볼 때마다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빨리 바닥을 볼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리첸의 취미는 ‘쇼핑’이다. 수업이 없는 날이나 시간이 날 때 친구들과 함께 시내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가서 이것저것 눈요기를 하다가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산다. 한 번도 돈 때문에 망설이거나 고민한 적이 없다고 한다. 돈이 떨어지면 아빠가 금세 또 통장을 채워놓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한번은 리쳰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넌 중국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니, 아니면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니?” 우문에 현답이라고 해야 할까. 돌아오는 대답이 걸작이었다. “중국 특색의 시장사회주의예요. 그렇게 배웠거든요. 근데 솔직히 우리는 사회주의 시대를 안 겪어봤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그건 할머니한테 여쭤보세요. 할머니가 가끔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가 다 사회주의 시절 때 얘기예요.”

마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실까

리첸 말대로 그들 세대에겐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이 없다. 할머니가 간혹 들려주는 문혁 때 얘기나 대약진, 인민공사 시절 얘기들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나올 법하다. 시어머니 세대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쓰기보다는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포스트 개혁시대를 살고 있는 리첸 세대는 소비가 주는 쾌락을 한껏 만끽하고 있다. ‘낭비 근절’을 부르짖는 시어머니도 리첸에게만은 그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알고 계신 것이다.

가끔 리첸을 볼 때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그가 매번 쇼핑을 하고 명품을 살 때마다 내는 100위안, 50위안짜리 인민폐 속에 ‘모셔져 있는’ 마오 주석은 지금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하고 말이다. 40년 전 마오는 문혁을 일으키면서 “중국 사회의 모든 자본주의적 악귀들을 몰아내자”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마오는 중국 인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돈’이 됐다. 식당이나 상점 등에서는 마오를 ‘재물신’으로 모셔놓고 그에게 “제발 돈 좀 많이 벌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심지어 마오를 상품화한 각종 캐릭터 제품들이 쏟아져나오고, 마오를 간판으로 내건 ‘마오 식당’들이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마오의 고향은 ‘붉은 여행’ 상품으로 개발돼 사시사철 관광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돈을 캐는 혁명의 성지’가 되었다. 영웅도 ‘소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인민폐 속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마오 주석이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동지들! 지금은 계급혁명 만세가 아니라 소비혁명 만세의 시대가 왔습니다. 모두 경제시대의 혁명적인 소비전사들로 나서시오! 소비혁명 만세, 만세, 만세!”

(한겨레21 / 박현숙 전문위원 2006-5-30) 

그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벗에게 총을 겨누고 분파투쟁 속에 중국을 피로 물들인 홍위병들 … 방치된 채 찾는 이조차 없는 그들의 무덤, 충칭 문혁묘군을 찾다

우거진 수풀 속에 찾는 이 없는 묘비들만이 고즈넉이 우뚝 서 있었다. 공원 경내를 오가는 시민들은 외면하듯 찾지 않았다. 간간이 호기심 어린 젊은 연인들 몇 쌍이 묘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지만, 오래된 묘비들만이 우두커니 서 있는 괴기로운 광경에 이내 발길을 돌렸다. 오랫동안 누구도 돌보지 않은 듯한 묘비와 묘소. 날짜를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1967년과 68년 두 해 간의 사망기록. 10대 중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수백 명의 사망자 연령대. 낡은 묘비에 박힌 ‘열사’라는 뜻밖의 칭호.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하게 현존하는 충칭 홍위병(紅衛兵) 묘소는 철저히 방치된 채 찾는 이조차 없었다.

‘죽더라도 마음은 마오쩌둥을 받들며’

유명 고등학교와 명문대학들이 몰려 있는 충칭시 사핑빠의 한 공원 안에 자리잡은 문혁묘군(文革墓群)에는 1966년부터 76년까지 중국 전역을 광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던 404명의 홍위병들이 잠들어 있다.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다니면서, ‘조반유리‘(造反有理·반발에는 이유가 있다), ‘파구입신’(破舊立新·구사회를 파괴하고 새 사회를 건설하자)이란 구호를 외치며 중국을 뒤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전사인 홍위병.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의 혼령이 잠들어 있는 문혁묘군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전체 면적이 2100㎡에 이르는 문혁묘군은 나지막한 언덕과 인공호수를 끼고 있는 명당에 터를 잡고 있다. 콘크리트로 잘 다져진 지반 위에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계단식 묘소 형태인 군묘는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특이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죽어서도 마음은 언제나 마오쩌둥이 있는 베이징을 바라보고 받들려는 의지의 표현’(心向紅太陽)이라고 한다.

문혁 연구자인 후치(42)는 “문혁군묘는 원래 국공내전 당시 사망한 공산당원의 유해 몇 구가 안장된 곳이었다”며 “1967년 6월부터 ‘8·15’ 조직 출신 홍위병 사망자가 하나둘씩 여기에 묻히면서 홍위병을 위한 묘소로 탈바꿈했다”고 전했다. 전체 128좌의 묘소 가운데 113좌가 1967~68년 숨진 홍위병 출신들의 묘소다. 1969년 1월 최후 사망자의 묘소가 조성될 때까지 일부를 제외한 ‘8·15’ 홍위병들은 모두 이곳에 묻혀 있다.

1966년 5월29일 베이징 칭화대 부속중학교에서 처음 조직된 홍위병 운동은 불길처럼 급속히 중국 전역으로 확산됐고, 같은 해 7월 내륙의 변방도시인 충칭을 강타했다. 8월 초부터 충칭시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홍위병 조직은 학교 내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탈권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한 학교 내에서도 여러 개의 분파조직으로 나뉘었던 홍위병들은 기존 당정조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8월15일 이런 국면을 타개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각목으로 무장한 충칭사범대학 내 2개 홍위병 조직이 당정조직 공작조가 지키고 있던 대학 내 공산당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한 것이다. 격렬히 저항하는 공작조에 불리함을 느낀 충칭사범 홍위병들은 곧바로 주변 대학과 중·고등학교 홍위병 조직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4천여 명의 홍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결국 대학 내에서 당정조직원들을 축출한 홍위병들은 이를 기념해 ‘8·15’ 홍위병연합조직을 건설한다.

인민해방군과도 무력충돌

‘8·15’를 중심으로 한 홍위병들의 탈권투쟁은 홍위병 운동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했다. 가장 큰 변화는 홍위병 조직의 확대와 지역 내 권력 장악이다. 우선 학교의 당정 권력을 손에 넣은 홍위병들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 거대한 군중 조직으로 변모했다. 학교 내부의 여러 홍위병 조직들이 통합해가면서 확대 개편됐고, 기업과 공장의 탈권 투쟁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학생 신분에서 혁명을 주도하는 조반파가 된 홍위병들은 탈권투쟁 과정에서 점차 내부적으로 의견 충돌을 빚기 시작했다.

급기야 12월4일 충칭 다톈완 경기장에서 열린 ‘자산계급과 반동노선 비판대회‘에서 홍위병 조직이 주도해 문혁을 완수해야 한다는 ‘8·15’ 연합과 노동자·농민을 비롯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학생 출신의 홍위병을 지도해 혁명을 이끌어야 한다는 ‘노동자규찰대’ 간에 주먹질이 오가는 사건이 벌어져 수십 명이 다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충칭의 홍위병 조직은 두 분파로 나뉘어 격렬한 노선 투쟁에 들어갔다.

1967년 2월 ‘8·15’ 홍위병들이 주도해 ‘충칭혁명조반연합위원회’를 조직하자, 이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도저’(反到底)라는 또 다른 연합조직을 건설한다. 당시만 해도 두 홍위병 분파 간의 투쟁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권고한 ‘글로 싸울 것이며, 무력으로 싸우지 말라’는 강령처럼 토론을 통한 투쟁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4월 당정조직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혁명위원회 간부 선출을 두고 두 분파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홍위병 조직 간의 마찰은 끝내 무력투쟁으로 치달았다.

홍위병 분파 간 무력투쟁에 불을 댕긴 것은 문혁을 일으킨 ‘4인방’이었다. 4인방의 일원이었던 장칭은 7월22일 허난성 홍위병 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한 홍위병 조직이 ‘문공무위’(글로 공격하고 무력으로 지킨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는데 그 구호는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문회보>에서는 이런 사실을 보도하면서 ‘문공무위’ 구호를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다. 이때부터 홍위병 분파 간 혹은 조반파 분파 간 무력투쟁은 공식적으로 정당화되고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4인방으로부터 이론적인 근거까지 얻은 충칭 홍위병들의 무력투쟁은 8월에 접어들면서 극에 달해, 인민해방군과 직접 충돌을 빚기도 했다. 1989년 충칭시 지방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충칭대사기>를 보면, 1967~68년 발생한 ‘8·15’와 ‘반도저’ 분파 간의 무력투쟁은 규모가 큰 것만 31차례다. 기관총·박격포·곡사포·탱크·함선 등 중화기를 동원한 전투만 24차례에 달한다. 이 기간 동안 1만여 발의 포탄이 전투 중 사용됐는데, 당시 충칭 홍위병의 무력투쟁은 중국 최대 규모였다.

버려진 홍위병 묘소에 안식하고 있는 404명 희생자들은 대부분 10~20대의 젊은이다. 가장 어린 매장자는 14살이다. 35%가 학생이고 59%가 노동자였던 이들 홍위병이 총부리를 겨눈 사람들은 며칠 전만 해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던 벗이었다. 암울한 시대를 헤쳐 살아남은 홍위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받들었던 마오쩌둥과 자신들을 지도했던 4인방에게도 버림받는다. 1968년 8월부터 마오쩌둥과 4인방이 파견한 노동자와 인민해방군 선전대는 충칭 각 학교에 진입해 홍위병들을 무장해제하고 계파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전국적으로 시행된 하방정책에 따라 홍위병들은 농촌으로 쫓겨났다.

머리나 신체 한 부위만 있었던 시신들

문혁묘소에서 만난 ‘8·15’ 조직 홍위병 출신인 랴오(63) 노인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자책한다. 문혁묘군에 사망한 홍위병 동료를 직접 묻었다는 그는 “당시를 생각하면 공포만이 떠오른다”고 회상했다. 랴오는 “전투에서 죽은 동료들의 주검을 수습한 뒤 여기로 가져와 몇 개의 큰 갱을 파고 관도 없이 주검 수십 구를 한꺼번에 매장한 뒤 흙과 시멘트로 덮었다”면서 “격렬한 전투 때문에 머리나 신체 한 부위만 있는데다 날씨가 더워 온통 썩는 냄새가 진동하던 당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한겨레21 / 모종혁 통신원 2006-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