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로 노출된 카지노식 오락기…이젠 초등생까지 노린다

초등학교 수업이 끝날 무렵인 24일 오후 3시쯤. 구미시내 한 초등학교 정문 부근 문구점에 설치된 게임기에 한 무리의 하굣길 초등학생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언뜻 4∼5학년 쯤 돼 보이는 한 아이가 게임기에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단추를 누르자 화살표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게임기 화면에 배열된 숫자 중 한 곳에 화살표가 멈추면 해당 숫자만큼 금속 메달이 게임기 밖으로 쏟아진다. 메달은 문구점에서 현금 100원과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회전판을 돌려주는 '딜러'만 없을 뿐 성인 카지노의 '룰렛'과 다를 게 없다. 대부분 '0'에 멈추지만 가끔 '5'나 '7' 앞에 멈출 때면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한 아이가 100원짜리 동전 10개를 모두 탕진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비슷한 시각 다른 초등학교 정문 앞. 정문을 뛰쳐 나온 학생 10여명이 일제히 한 곳으로 달려갔다. 이들이 발길을 멈춘 곳은 문구점 귀퉁이 자그마한 오락기였다. 100원을 넣고 버튼을 두드리다 멈추면 바늘이 가리키는 숫자에 따라 많게는 수천원어치 메달을 받을 수 있는 오락기였다. 동전처럼 생긴 메달이 나오면 문방구에서 학용품과 과자를 살 수도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한 초등생은 하루에 몇 번 오락을 하느냐는 질문에 "가끔은 아침에도 오고 수업 마치면 친구들이랑 자주 오는데 어제는 다섯 번이나 오락을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부근 사행성 게임기는 새로운 문제가 아니지만 최근에는 성인 카지노 형식을 본뜬 게임기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돈처럼 쓸 수 있는 '칩'까지 도입한 것은 새로운 문제였다.

같은 시각 또 다른 초등학교 앞에도 오락 게임기에 빠져 있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동물동물' '포 버 세븐' 등의 게임기는 단순한 방법으로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돼 판단력이 흐린 초등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일명 '키카이오''초강전기' 등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사행성 오락기는 아니지만 폭력 영상물 오락기 이용으로 빚어질 폭력성은 방치할 수 없는 수준이다. 서로 때리는 격투 게임은 기본이고 상대방을 죽여야 끝이 난다.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중독증에 걸린 듯 몰두하는 어린이들에게 폭력의 무감각증을 키우고 있었다.

크레인 게임기로 불리는 일명 '뽑기' 게임도 인기 품목이다. 손목 무전기, 인형, 장난감 등 상품도 다양하지만 대부분 조잡한 제품이다. 인형뽑기에 성공한 아이들과 현금으로 바꾸는 거래도 가능했다. 작은 돈으로 큰 것을 뽑을 수 있다는 일확천금식의 사고방식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는 사행심 조장이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초등생들의 사행성 오락기 이용 붐도 문제지만 오락기를 단속할 수 있는 법규가 없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현재 성인오락실이나 PC게임방 등을 단속하고 있는 구미시는 어린이들이 이용하는 사행성 오락기를 단속할 법규가 없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사행성 오락기가 아닌 일반 오락기는 현재 점포당 2개까지 설치가 가능하다. 다만 구미경찰서가 가벼운 벌금형으로 사법처리하고 있으나 올들어 단속 건수는 14건 뿐이었다.

학교 측과 교육청의 무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학교장과 교사는 학교 주변 유해업소를 수시 점검 및 계도하고 이러한 불법 사항이 지속될 경우 교육청 또는 사법기관에 고발해야 할 의무가 있으나 이를 이행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초등학교 한 관계자는 "문구점 영업권과 맞물린 부분으로 학교에서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있기 때문에 영업주들의 도덕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 석모씨는 "용돈의 대부분을 사행성 오락기에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수 차례 자제를 당부했지만 효과가 없다"며 "판단력이 흐린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얄팍한 상술이 너무 밉다"는 글을 구미시청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영남일보 / 백종현 기자 2006-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