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 키운 러시아, 다시 미국에 맞선다

에너지 자원과 7%대 경제성장 덕에 국력 커져…

중동외교ㆍ군비증강으로 미국과 마찰

“러시아는 발사 후 스스로 궤도를 변경해 목표물을 찾아가는 미사일의 실험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이 미사일은 미사일방어(MD) 체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54)이 지난 1월 31일 크렘린궁에서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푸틴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과 같은 날을 택해 무려 3시간30분 동안 진행됐다.

64건의 질문에 답하며 신랄한 용어로 민감한 국제문제에서 미국과 상반된 입장을 거침없이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주요 8개국(G8)보다 경제력이 뒤지는 러시아가 오는 7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릴 G8 정상회의 의장국을 맡아 논란이 있다”는 질문이 나오자 “러시아가 빠진 G8은 살찐 고양이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가 옛 소련의 영화(榮華)를 부활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각종 국제 현안에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에 맞서 ‘힘의 외교’(Muscle Diplomacy)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냉전’(New Cold War)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푸틴의 목표는 G8 정상회의를 계기로 앞으로 국제질서를 미국, 중국, 러시아의 3강 체제로 정립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러시아가 1991년 소련 붕괴 후 발을 뺐던 중동지역에 다시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침공으로 이 지역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분위기를 틈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란 핵 문제의 중재와 하마스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지원이다. 러시아는 이란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를 추진하는 미국과 유럽 연합(EU)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러시아는 또 ‘이란의 우라늄 변환 작업은 허용하지만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이 있는 우라늄 농축 작업은 자국이 맡는다’는 중재안을 내놓는 등 국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란의 부셰르 핵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는 러시아의 중재는 향후 이란의 원전시장까지 석권하려는 포석이다. 물론 미국의 군사 공격에 강력히 반대하면서 이란에는 토르-M1 방공 미사일 체계를 수출하는 등 짭짤한 재미도 보고 있다. 토르-M1은 크루즈 미사일, 스마트 폭탄, 무인 원격조종 항공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전천후 방공망 체계이다.

푸틴은 또 지난 3월 미국이 테러단체로 규정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초청했다. 러시아의 대담한 행동은 미국의 눈치를 보던 상당수 국가들이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인정하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미국의 경제 봉쇄에 맞서 1000만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미국, EU, 유엔 등과 함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중동평화 로드 맵(road map)을 추진해온 이른바 ‘쿼텟’(Quartet:4개 중동평화 중재 당국)의 일원이다. 중동지역에서 이슬람주의의 구심체로 떠오른 하마스와 새로운 관계 정립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속셈이다.

푸틴이 중동 문제처럼 국제 현안에서 미국에 대해 각을 세우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푸틴은 지난해 4월 25일 연례 국정연설에서 “옛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인 재앙이었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말해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지정학적 영향력과 지배력을 넓혀가면서 세계를 전략적 불균형 상태로 빠뜨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민주주의 확대’라는 전략을 앞세워 바로 러시아의 앞마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까지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굴욕적인 국제질서의 재편이었다. 푸틴은 특히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으로 동독에서 활동하면서 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옛 소련에서 KGB는 ‘국가 속의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권력을 행사했다. 때문에 많은 엘리트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이 기관에 들어갔다. 푸틴도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를 다니다 KGB 요원으로 특채됐다. 푸틴을 포함한 이들 KGB 엘리트들은 국가에 충성심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아침에 소련이 몰락하는 상황을 보면서 이들의 가슴속에는 응어리가 맺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언젠가 소련이 부활해 다시 미국과 힘 겨루기를 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의 국장을 역임하고 총리직을 거쳐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은 ‘KGB 엘리트의 대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가 내세운 ‘강한 러시아 건설’이라는 슬로건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는 집권 초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추진하고 있는 미국에 대항하기보다는 국내 정치적으로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경제재건, 부패척결, 전문관료제의 강화 등 개혁 정책을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하게 자신의 신념을 실현시킬 방법을 추진했다. 석유 등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정치까지 주물러온 올리가르히(신흥 재벌)들을 과감하게 숙청한 것이 그의 통치전략 중 하나였다. 이와 함께 크렘린궁을 비롯해 국가 최고 권력기관의 실세들을 모두 KGB 출신 엘리트인 ‘실로비키’(siloviki:제복을 입은 남자들이란 뜻)로 갈아치웠다. 그는 지방통제를 위해 러시아의 89개 연방을 7개 연방지구로 나눠 각 지구에 대통령 전권대표를 파견했다. 또 주지사를 직선제에서 임명제로 바꾸었다. 언론에 대한 철저한 통제 정책을 실시, 정부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차단했다. 2003년 10월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인 유코스의 사장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전격 구속하는 등 에너지를 비롯한 국가기간산업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강화했다. 그는 일종의 ‘관리 민주주의 체제’를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구축했다. 옛 소련의 이데올로기도, 서방의 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강한 러시아’를 건설하자는 국가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통치 방식에 국민의 80%가 지지를 보내고 있다.

특히 강력한 국가 건설 전략은 에너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푸틴은 FSB국장 시절인 1998년 10월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광업대학에서 ‘시장경제제도 형성기의 천연자원 재개발을 위한 전략’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자원이 국가 경제 발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가가 에너지 자원 개발을 주도해야 하며, 자원 분야에 대한 외국 자본의 과도한 진출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이 생각한 러시아의 발전 전략은 에너지 자원의 국유화를 통해 국가의 힘을 비축하는 것이었다.

푸틴의 구상은 2003년 ‘에너지 2020’이라는 청사진을 통해 구체화됐다. 이 청사진에 따르면 러시아는 2020년까지 세계 7대 무역국과 세계 10대 자본 수출입국이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전략은 현재의 에너지 자원으로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첨단기술 등에 집중투자를 통해 세계 경제 강국의 대열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푸틴의 집권기간인 지난 7년간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며 열강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 러시아는 이미 각국의 물가 차이 등을 감안한 실질 구매력 측면에서 세계 10위로 부상했다. 미래 전망은 더욱 장밋빛이다.

러시아 경제가 앞으로 연평균 4%대 성장률을 기록하면 2050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 5만달러의 세계 6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예측했다. 골드만삭스는 “교육 수준이 높은 1억4500만명의 인구, 석유와 천연가스 등 풍부한 지하자원, 우주·항공·통신 분야 등에서 높은 기술력 등을 보유한 러시아가 일류 국가로 올라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분석했다.

러시아의 각종 경제지표는 달라진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GDP 성장률은 1999년 이후 지난해까지 6년 연속 플러스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최근 2년간 7% 이상이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인 데다 올해도 고유가 덕으로 6%대 이상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오일 머니는 국가 재정의 80%를 차지할 정도다.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지난 4월 말 2257억달러로 중국(8750억달러), 일본(8320억달러), 대만(2570억달러)에 이어 세계 4위 규모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옛 소련과 러시아를 통틀어 역대 최대이다. 또 러시아 중앙은행은 연 55%에 달하는 외환보유고 증가율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외환보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늘어나는 외환보유고 소진을 위해 국제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의 채무를 연내까지 모두 변제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옛 소련 부채 잔여분을 포함해 파리클럽에 298억달러를 빚지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경제발전은 사상 유래 없는 고유가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다. 산업 전반에 걸쳐 체질 개선을 해야 하는 러시아로서는 막대한 재정흑자는 힘을 기르는 데 필수요소가 되고 있다. 푸틴의 전략이 그대로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경제 호황과 에너지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춘 푸틴은 자신의 야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중동 문제에 개입하고 나선 것이 이를 증명한다. 중동은 과거부터 초강대국이 경쟁하는 각축장이었다.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독점해온 미국은 러시아에 의례적인 몫만을 주었지만 현재는 상황이 바뀌었다.

러시아의 반미 행로는 지난해 7월 1일 푸틴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당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공동선언문’을 통해 “주권국의 객관적인 발전 과정을 무시하고 외부로부터 특정한 사회·정치적 모델을 강요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선언문은 이어 “국제문제에서 독선과 압제를 지향하지 말아야 하며 지도 국가와 지도를 당하는 국가로 나누려는 기도도 사라져야 한다”고 밝혔다. 바실리 미하일예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연구소 부소장은 “이 공동선언은 냉전시대의 정신으로 쓰인 것”이라면서 “냉전시대에 사용됐던 용어들이 공동선언에 들어간 것이 이를 입증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이웃 국가들의 민주 혁명을 배후 조종했으며 이를 통해 자국의 고립을 획책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올 들어 실시된 우크라이나 총선과 벨로루시 대선에 깊숙이 개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과는 아예 옛 소련시대처럼 자동 군사개입이 가능한 상호 방위협력 조약까지 체결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자국의 영향력에 있는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지난 1월 1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천연가스 금수조치를 내린 것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징계인 동시에 러시아의 힘을 미국 등 서방에 대해 과시한 것이다.

러시아는 이와 함께 군사력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푸틴은 지난 5월 10일 연례 국정연설을 통해 “군비경쟁의 종말을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외국의 정치적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4월 발표된 러시아 군 체제 개편안에 따르면 핵무기를 통제하고 있는 전략미사일군 위상 강화와 군 현대화에 예산을 집중키로 했다. 소련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인 이 개편안의 핵심은 미국의 MD 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는 전략미사일군의 토폴-M 미사일 개발이다. 토폴-M 미사일은 여러 개의 탄두가 핵탄두와 함께 장착되어 최종 공격 목표에 접근하면 미사일은 여러 조각으로 분리되어 진짜 핵탄두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장술도 갖추었다. 토폴-M 미사일은 소련 시절부터 제작과 실험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지만 러시아의 집중 개발로 실전배치의 단계에 이르렀다. 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장착한 핵 잠수함 두 척을 소련 붕괴 이후 처음으로 실전 배치할 예정이다.

특히 러시아는 미국이 자국의 ‘민주체제’에 간섭하는 것에 반감을 표출하고 있다. 푸틴이 지난 1월 외국의 지원을 받는 NGO의 활동을 통제하는 법률에 서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푸틴은 “모든 민주주의 원칙과 주요 제도는 러시아 사회의 발전 정도와 우리의 역사 전통에 합당해야 한다”면서 “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법을 만들고 이를 국가가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날이 선 푸틴의 발언으로 볼 때 미국과 러시아의 밀월시대는 이미 끝났다. 미국도 이미 등을 돌린 러시아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미국의 초당적 싱크탱크인 외교관계위원회(CFR)는 ‘러시아의 잘못된 방향’(Russia’s Wrong Direction) 이란 제목의 보고서(지난 3월 5일자)에서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에너지를 무기화 하는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는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될 수 없으며 미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지난 1월 전문가들을 초청, 러시아의 전략을 논의하고 존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에게 푸틴 대통령의 행보를 면밀히 예측하도록 지시했다. 러시아 전문가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지난 2월 말 대책 마련을 위한 전략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체니 부통령이 5월 4일 리투아니아에서 개최된 발트-흑해 지도자 국제포럼에서 “푸틴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에너지를 유럽에 대한 정치적 압박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미국의 러시아 정책이 바뀌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미국은 G8 정상회의에서 비민주적인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 곤혹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푸틴은 그 동안 G8 정상회의에서 옵저버에 머물렀던 러시아의 위상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새롭게 정립, 옛 소련에 버금가는 반열에 올리겠다는 야심이다.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 체제를 ‘군주제’로 잘못 표현하는 말실수를 한 적이 있다. 부시의 실수가 고의는 아니었지만 러시아의 현 체제에 대한 그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표트르 대제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보여왔다. 때문에 미국 언론들은 그를 ‘제2의 차르(Czar: 제정러시아 황제)’를 꿈꾸는 전제군주라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냉전 시절 미국에 망명한 옛 소련의 반체제 작가 알렉산데르 솔제니친이 ‘모스크바 뉴스’와의 회견(지난 4월 27일자)에서 “푸틴 대통령이 강한 러시아를 건설하기 위해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평가한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주간조선 2006-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