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47% “나는 중도”…4년새 17%p 늘어

우리 국민의 47.4%가 보수·중도·진보의 이념 성향 가운데 자신을 ‘중도’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2년의 30.4%에서 크게 늘어난 수치로, 최근 4년 동안 국민 이념의 ‘중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한겨레>가 창간 18돌을 맞아 지난 7~8일 한국 사회과학 데이터센터(KSDC·소장 이남영 숙명여대 정치학과 교수)를 통해 전국 19살 이상 성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이념 성향 추적’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한겨레>와 한국 사회과학 데이터센터는 2002년부터 2년 간격으로 한국인의 이념 성향을 동일한 방법으로 조사해 왔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당신의 이념적 성향은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보수 36.2%, 중도 47.4%, 진보 16.4%로 대답했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중도라고 밝힌 응답자의 비율은 2002년 30.4%, 2004년 37.8%, 올해 47.4%로, 4년 사이에 17%포인트나 늘어났다.

보수라는 의견은 같은 시기에 43.8%→38.7%→36.2%로 줄어들었다. 진보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도 2002년 25.8%에서 2004년 23.5%로, 그리고 올해는 16.4%로 감소했다.

김형준 사회과학 데이터센터 부소장은 “경제의 어려움과 양극화 심화 등으로 생활 자체가 위협받으면서, 국민들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적 갈등에 대한 피로감이 커진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그렇지만 ‘약자배려’(진보)와 ‘국가안보’(보수)에 해당하는 4개 문항에 대한 답변을 토대로 분석한 객관적인 이념의 일관도에선 올해 ‘일관된 진보’가 27.2%로 ‘일관된 보수’(22.5%)보다 조금 우세했다. 사안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는 ‘혼재’층은 50.3%였다.

이번 조사의 오차 범위는 95%의 신뢰 수준에서 ±3.1%포인트다.

<이태희 기자>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 쏠림현상 심해져
“사회문제 서둘러 개선” 적극 찬성 32.4%
대북 지원 찬 53.5%-반 46.5% 좁혀져

국민들의 이념 성향이 중도 쪽으로 좀더 쏠리는 경향은 구체적인 정치·사회·경제 현안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한겨레〉는 2002년부터 올해까지 응답자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물었다. △대북지원에 대한 찬반 의견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 문제 △시위에 대한 규제 문제 △성장론과 분배론에 대한 의견 등 10개 항목이다.

올해 응답자들의 답변을 보면, 경제적 이념 성향에서 보수적 사고방식이 좀더 우세해진 점이 눈에 띈다.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대해 이번 조사에서는 78.7%가 찬성 견해를 밝혔다. 2002년 68.9%, 2004년 72.9%에 견줘 ‘성장 중시론’이 늘어난 것이다. 반면, ‘증세를 통한 복지확충 정책’에는 2002년 61.0%, 2004년 61.9%가 찬성했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59.8%로 찬성 비율이 조금 줄었다. 특히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응답은 2002년 28.2%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17.3%로 10.9%포인트나 감소했다.

참여정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개혁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들도 많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의 잘못된 점은 무리가 따르더라도 빠르게 고쳐나가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응답은 2002년에는 57.7%로 과반수였으나, 2004년 41.3%로 줄더니 이번 조사에서는 32.4%로 크게 떨어졌다. ‘대체로 찬성한다’는 응답까지 아우른 찬성 비율도 올해 84.8%로, 2004년(88.1%)보다 줄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권리의식은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당한 목적의 시위라도 사회규범을 해치면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응답자 비율은 2002년 49.6%, 2004년 35.9%, 2006년 29.7%로 크게 줄어들었다.

보수적 인식의 확대 양상은 한반도 안보와 관련된 대북·대미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민족적 차원의 대북 경제지원 확대’에 대해 2002년에는 찬성과 반대 비율이 58.9% 대 41.1%였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53.5% 대 46.5%로 격차가 좁혀졌다. 이와 함께 ‘한반도 안보와 관련해 우리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미국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견해에 찬성하는 응답 비율은 20.0%→30.2%→37.1%로 점차 높아졌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62.9%(2006년)가 반대해, 여전히 자주적 대미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의견이 훨씬 많았다.

<최종훈 기자>

■ 주요 현안 의견 물어보니
“평택 시위 무력진압 안돼” 62.5%
“한-미 FTA 협상 나서야” 58.1%

우리 국민의 62.5%는 정부가 평택 주민들과 평화운동가들의 미군기지 확장 반대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데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한국인 이념성향 조사’를 실시하면서 대추리 사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결과 확인된 여론이다.

무력진압에 대해선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응답이 27.3%, ‘대체로 반대’한다는 응답이 35.2%였다. 이런 반대 의견은 보수·중도·진보의 모든 이념층에서 61.5~62.0%로 균등했다. 또 ‘한반도 안보에 대해 한-미 간 이견이 있을 때 미국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는 의견(62.9%)과 상당히 일치했다.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에 대해선 찬성 58.1%, 반대 41.9%로 나왔다. 피해가 클 것으로 보이는 농림어업 쪽은 66.7%가 반대했고, 비교적 자유로운 자영업 쪽은 67.3%가 찬성했다.

교육 문제와 관련해, 기여입학제에는 65.2%가 반대했지만, 평준화 폐지에 대해선 60.2%가 찬성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기여입학이 가능한 소득 상위층에서 기여입학제에 대한 반대 의견이 74.8%로 평균치를 넘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는 81.6%가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직업별로는 블루칼라의 찬성률이 91.3%로 높았으며, 화이트칼라의 찬성 비율도 84.2%로 평균 이상이었다.

<이태희 기자>


■ 직업 학력등으로 본 이념 친화도
소득 상위층 42%가 보수…노동자 진보 성향 퇴조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우리 사회 진보적 인물의 전형은 광주·전남에서 태어나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대학생(또는 대학 졸업자)이다. 보수의 이념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이북 태생으로 강원도에 사는 50대 이상의 자영업자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 지형을 연령별로 따져보면, 진보라는 답변이 가장 많은 층은 20대(25.0%)이고, 보수라는 답변이 가장 많은 층은 50대 이상(44.9%)이다. 학력별로는 진보의 경우 대학 재학 이상(21.9%)에서 가장 많았고, 보수라는 답변은 고졸층(42.9%)에 몰렸다. 또 소득별로 봤을 때 보수는 역시 상위층(42.4%)이었고, 진보는 하위층(20.2%)에서 상대적으로 많았다. 중산층은 다수(48.8%)가 중도를 택했다.

직업별로는 학생층(25.3%)에서 진보라고 밝힌 이들이 많았고, 보수는 자영업자(41.7%) 쪽에서 답변층이 두터웠다. 전통적으로 진보 쪽이라는 답변이 높았던 사무직노동자(화이트칼라·16.4%)와 육체노동자(블루칼라·11.8%)에서 진보적 성향의 퇴조가 눈에 띈다.

<이태희 기자>

■ 어떻게 조사했나?
답변 일관성에 초점
변화 추이 지속 추적

〈한겨레〉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2002년부터 2년마다 공동으로 벌이고 있는 ‘한국인 이념성향 조사’는 다른 조사방식과 여러 측면에서 차별화돼 있다.

이 조사는 이념의 일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념이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신념으로, 일관성이 핵심적인 평가 기준이다. 이를테면, 한 개인이 네 가지 정책 사항 가운데 두 항목에서는 ‘매우 진보’로, 다른 두 항목에서는 ‘매우 보수’로 응답하면 다른 조사방식에서는 ‘중도’로 규정된다. 이는 그릇된 결론이다. 이 개인은 ‘중도’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무정향’으로 평가해야 한다.

한겨레 조사는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정책에 대한 의견에서 일관성을 주목했다. 분석 결과, 여러 정책 설문 항목 중 ‘약자 배려’(‘대북 지원’과 ‘정부 빈민지원’)와 ‘국가안보’(‘미국 의견 존중’과 ‘국가보안법 개정’)라는 2개의 핵심 요인이 한국인의 이념 성향을 가장 적절히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는 이에 대한 답변의 일관성을 바탕으로 한다.

또 일회성 조사가 아니라 동일한 설문항을 바탕으로 2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해, 한국인의 이념 지형의 변화 추이를 정확하게 추적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 조사는 응답자의 주관적 이념 성향뿐 아니라 객관적 이념 성향을 동시에 평가해 분석의 질을 끌어올렸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집필진>

(한겨레신문 2006-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