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 그 '야만의 재구성'

[서평] <서양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문명은 과연 야만이라는 단어와 대척점에 있다고 호언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인류가 형성한 '문명'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드높이고 더 많은 이들이 윤택한 삶의 질서를 누리게 하려는 목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종종 문명이 그들만의 질서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윤색된 파시즘과 결합했을 때, 종종 극단적인 폭력과 야만의 또다른 형태로 변질되는 모습을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 푸른 역사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유대인 대학살은 단순히 독일이나 유럽을 넘어 인류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있다. <서양현대사의 블랙박스-나치 대학살>(저자 최호근 / 푸른역사)은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같은 일부 영화나 다큐멘터리로만 보아왔던 서양현대사 이면에 숨겨진 사회적 배경과 폭력의 매커니즘을 고발하는 이야기이다.

괴테와 바흐, 칸트의 고향으로 불리우던 문명 국가 독일, 그것도 서양 문화의 본산이자 독일 민주주의의 뿌리로 불리우던 바이마르 일대에서 벌어진 잔혹한 유대인 강제 수용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문명의 기술적 발전이 과연 인류의 진보와 동의어로 생각할 수 있는지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게 만든다.

20세기 독일에서 등장한 나치즘과 파시즘의 뿌리, 인종차별주의가 유럽에서 극성을 부렸던 기원과, 유대인들이 제일의 피해자로 무기력하게 참화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인류 역사의 최대 비극이 소수의 결정권자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와 집단적인 광기에서 비롯된 공동책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반유대주의의 근원은 중세부터 이어지는 서양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종교성에서 출발한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종교제일주의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박해와 추방을 넘어 탄압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도구로 변질되었다. 여기에 유대인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한 독일 나치정권의 폭력성과 이들에 당대 독일 사회의 암묵적인 지지가 결합하며 잔혹한 학살의 매커니즘이 완성된 것이다.

문명화된 야만의 공포 - 역사는 반복될 수 있다

저자는 대학살극을 기획한 것은 나치 정권이지만, 이들의 범죄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심정적으로 지지를 바친 지식인 계급과 관료체제 또한 죄악을 잉태한 공범들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의 역사는 체계화된 관료제와 파괴적 근대문명의 지원을 입어 현실의 공포로 구체화되었다.

한 세기 이전의 기록을 들춰내면서도 그저 이것을 지나간 역사의 흔적으로만 치부할수 없는 것은 불행하게도 우리의 근현대사 역시 20세기의 강을 건너면서 이런 학살과 광기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빈번한 민간인 학살, 해방후 벌어진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 한국전쟁과 군사 독재정권 시절을 거치며,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수많은 민중들의 피와 눈물을 거름으로 삼아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왔다.

바로 '문명화된 야만의 공포', 저자가 20세기 인류 역사의 가장 추악한 기록이 담긴 블랙박스를 꺼내들며 강조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저마다의 이념과 종교-국가적인 명분, 질서와 권위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은 종종 인간을 위협하는 도구로 변질될수 있다. 이 책은 <매트릭스>나 <브이 포 벤데타>같은 영화에서도 보여졌듯이, 인간을 보호해주어야할 과학문명과 관료체제가 집단화된 광기와 결합하면서 오히려 인류의 평등과 자유를 위협하는 공적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오마이뉴스 / 이준목 기자 2006-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