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러시아 신냉전 시대?

미국과 러시아의 정치적·감정적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러시아 포위전략 논란과 이란 핵 문제 등을 놓고 두 나라 갈등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 가운데, 러시아 문전의 동유럽 순방에 나선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민주주의 확산’을 주문해 또다시 러시아를 자극하고 나섰다. 냉전 해체의 주역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신냉전’이라는 표현까지 썼고, 옛 소련 체제 비판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미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로이터통신> 보도를 보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 신문 기고문에서 “러시아에 강경하게 대처하라는 요구가 워싱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며 “러시아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냉전 재발에 경각심을 갖는 이들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올해 들어 러시아의 ‘형제국’인 벨로루시 대선과 이란 핵, 팔레스타인 지원 등을 놓고 양쪽이 사사건건 대립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특히 옛 소련의 우산 아래 있던 나라들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강화는 러시아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다. 미국과 가까워진 그루지야는 소련에 속했던 공화국들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 탈퇴 여부를 지난 2일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확산’과 ‘에너지 안보’를 화두로 리투아니아와 크로아티아, 카자흐스탄 순방에 들어간 체니 부통령은 4일 러시아를 거칠게 비판했다. 그는 발트해·흑해 주변국 정상회담에 모인 리투아니아,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루지야 정상들 앞에서 “러시아의 개혁 반대세력이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가리키는 듯한 말을 했다. 그는 또 “우리 중 누구도 러시아가 적이 될 것으로 믿지는 않을 것”이라며 ‘견제구’를 날렸다. 또 러시아가 유럽을 향해 가스공급 제한을 시사한 것을 “협박”이라고 비난했다. 체니 부통령은 크로아티아에서는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를 포함해 나토 가입을 기다리는 국가 정상들을 만난다.

지난달 조지 부시 대통령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진전이 더디다고 지적했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푸틴 대통령이 과도한 권력을 지녔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아직 러시아 편인 나라들까지 ‘민주주의’를 앞세워 포섭하려는 미국의 발걸음에 러시아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만나서는 서방이 위선적 행태를 보이며 러시아에 이중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부정선거라는 시비를 낳은 면에서는 벨로루시와 크게 다를 바 없는데도 미국이 지난달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을 환대하고, 카자흐스탄의 독재 문제에 눈감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 외무부는 워싱턴에서 열린 테러리즘 관련 토론회에 체첸반군 쪽 인사가 나온 것에 발끈해 지난달 18일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했다. 미국 대사들이 좀처럼 겪지 않는 일을 당한 것이다.

냉전 시절 미국에 망명해 소련을 비난하던 작가 솔제니친은 서방과 나토가 포위해 오고 있다며, 이번에는 러시아 편을 들고 있다. 그는 최근 <모스크바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와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권 수립은 나토의 영향력이 러시아 근처까지 확대되는 증거”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 여론조사에서는 러시아인의 30%가 미국이 국가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고 답하기도 했다.

(한겨레신문 / 이본영 기자 200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