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장치 작동안해 기업운명 검찰 손에…

구멍뚫린 경제시스템
‘편법증여·非理’ 시장은 외면, 정부선 눈치
내부 고발자를 배신자로 간주, 감시 안돼

재벌 오너의 편법·불법을 견제하기 위한 한국 경제의 ‘자기정화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 ①기업내부 ②시장 ③정부감독의 3단계로 구축돼 있는 감시 장치가 각종 기업 스캔들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하고, 검찰 수사로 불거지는 양상이 되풀이되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기업비리와 편법증여 사건 등은 경제 시스템 내에서 차단·시정되지 못하고, 으레 검찰이 나서야 하는 사법 기능의 몫이 됐다. 재계에선 “대기업 총수와 기업의 운명은 검찰이 좌우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마비된 사내 견제 기능

대기업 오너의 편법은 1차적으로 이사회(사외이사·감사위원회) 등 기업 내부에서 견제돼야 한다. 하지만 이사회 구성원이 오너들과 직·간접적인 친분관계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이사회의 견제 기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현대차 사외이사 4명 중 한 명은 이번 비자금 사건으로 체포됐던 현대차 K구매총괄본부장의 친형이다. 역시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K씨(전 안동회계법인 대표)는 경영진을 견제해야 할 이사회 감사위원장(현대하이스코)이면서도 대주주를 대신해 불법적인 부채탕감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또 2003년 삼성그룹에서 152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구속된 서정우 변호사는 1998년부터 삼성중공업의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으로 일했었다.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선 내부 고발자를 ‘배신자’로 간주하는 문화가 강해 내부 직원에 의한 감시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일섭 다산회계법인 대표는 “부정사건을 목격했을 때 구체적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규정을 만들어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편법을 외면하는 주식시장

정의선 기아차 사장의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의혹을 받은 현대차 계열사 글로비스는 작년 말 상장 직후부터 주가가 폭등, 공모가의 네 배까지 뛰었다. 현대차 계열사들이 글로비스를 적극 밀어줄 것이란 기대감에 너도나도 주식 매입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당시 증시에선 글로비스 주가가 상승할 것이란 장밋빛 보고서 일색뿐, 현대차와 글로비스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관투자가나 애널리스트(분석가)는 아무도 없었다. 시장의 견제 시스템이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산운용사 사장은 “만약 미국이었다면 시장 참가자들이 글로비스와 같은 문제 주식을 철저하게 외면해 ‘시장의 징계’를 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뒷북 치는 행정부

공정위·국세청·금감원 등 기업의 각종 편법·의혹을 감시해야 할 정부 당국 역시 사전 감독은커녕, 검찰 수사 등으로 사건화된 뒤에야 비로소 “대책을 검토해보겠다”며 뒷북을 울리기 일쑤다.

96년 말 삼성 이재용 상무의 편법증여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재경부·국세청은 “현행 법체계상 위법이 아니다”는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8000억원 재산헌납’으로 이어졌고, 글로비스 상장차익을 통한 현대차의 편법 승계 의혹도 정부당국은 손 놓고 있다가 결국 검찰 수사의 칼을 맞았다.

박상용 연세대 교수는 “정부 관리들이 (재벌 문제는) 꼭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손대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 김재호, 김종호, 이인열 기자 2006-5-3) 

[사설] 합법적 경영권 승계 불가능하다면

주요 대기업들이 경영권 승계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 가운데 재계와 학계에서 관련 제도의 적절성 여부를 놓고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원활한 경영권 승계가 가능하도록 제도를 보완해 불법과 편법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과 경영권은 세습(世襲)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양쪽 다 나름대로 논리적 근거를 갖추고 있는 만큼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단언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이 빚어지는 자체가 관련 제도가 지나치게 과도(過度)하고 경직돼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최근 물의를 빚었던 대기업 관련 사안들이 경영권 승계를 시도하다 비롯된 것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대주주가 꼭 2세에게만 회사를 물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경영권 승계 자체를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도 합리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경영권 향방이 불확실하면 회사의 지휘권이 크게 흔들리고, 나아가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실제 이와 관련, 우리 기업인들이 느끼는 부담은 대단히 크다.

현행 세제(稅制)는 30억원 이상을 증여하거나 상속할 때 50%의 세금을 물리고 경영권이 포함된 주식은 20~30%에 달하는 할증까지 하도록 돼 있다. 이를 정상적으로 지키면 상속 지분이 대폭 줄어들면서 경영권 승계가 사실상 힘들어진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차등의결권제도나 포이즌필(신주를 싸게 인수할 수 있는 제도) 같은 경영권보호장치가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다.

대기업들이 2세가 대주주인 비상장기업을 지원하거나 계열사 주식을 싼값에 배정받는 방법 등을 동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반면 선진국들은 대조적이다.

미국 일본 영국 등 대부분 국가가 상속세와 증여세를 크게 낮춰가는 추세이고 경영권과 결부됐을 경우 할인을 해주거나 납부를 장기유예하는 제도까지 도입하고 있다.

안정적 경영권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활성화에 더욱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임은 물론이다.

지금은 빈부 양극화나 경제력 집중 등 부정적 측면만 거론하며 일방적 주장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국력(國力)에도 보탬이 될 수 있을지 사회 각계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200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