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486…“마음은 진보인데 행동은 보수”

로마시대, 많은 집들의 문 안팎에는 각각 하나씩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두 얼굴의 신, ‘야누스’다. 야누스는 문을 지키는 신이었다. 한 쪽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을, 다른 쪽 얼굴로 나가는 사람을 관리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두 얼굴이 필요한 존재다.

<한겨레>는 서울에 사는 40대 남성 유권자 9명을 불러 5·31 지방선거를 주제로 표적집단 심층좌담회(FGD:Focus Group Discussion)를 열었다. 모든 선거 이슈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40대, 그들에게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엿볼 수 있었다. 희망과 불안, 긍정과 부정이 뒤섞인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조사의 공정성을 위해 좌담회 진행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플러스’가 맡았고, <한겨레>가 조사를 의뢰한 사실도 좌담이 끝난 뒤에야 밝혔다. 참석자들은 가명으로 자신의 발언을 기사화하는 데 동의했다.

관심사 아이교육·집·건강…노대통령 국정점수 30점안팎
“정치인 싫지만 투표는 꼭”…여성 정치인엔 “세계적 추세”

40대들의 입은 무겁고, 표현은 신중했다. 지금 한국의 40대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부터 68년 원숭이띠까지다. 20대까지를 대부분 박정희~노태우 정권의 군부독재 아래서 보낸 이들이다. 솔직하기보단 입을 닫아야 했고, 군중이 되기 전에는 목소리를 높이기가 힘들었던 세월. 그러나 1987년 6·10 항쟁과 6·29 선언을 전후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우리 사회 진보와 변화의 중추인 ‘386’ 세대이기도 하다.

지난달 27일 심층좌담회를 위해 리서치플러스 사무실에 모인 40대 서울 남성 9명은, 그런 세월을 지낸 탓인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솔직한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야누스가 지키려는 것들은? = 먼저 이들에게 관심사를 물었다. 이들이 ‘문지기’가 되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의 정체도 떠봤다. 구로구에서 부동산업을 하는 진동호씨는 “자녀와 자녀의 교육”이라고 입을 뗐다. 영등포구에 사는 사무직 김동삼씨는 “집, 그리고 건강”이라고 했다. 용산구에 사는 김용규씨는 사무직인 탓에 “실직의 위험, 그리고 창업에 대한 정보”를 꼽았다. 역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이었다.

정치는 구역질 나지만, 투표는 꼭 한다 = ‘정치에서 뭐가 연상되느냐’는 질문에 참여자들은 일제히, ‘검은 돈’, ‘부정부패’, ‘사과박스’ 등의 단어를 열거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하기도 싫은 단어”(최동선)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정치인이 좋은 느낌을 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김영규씨는 그러나, “투표는 꼭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정치가 싫다고 해도, 그래도 ‘저 사람은 낫겠지’하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형주씨도 “무관심하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40대의 힘’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연령별 유권자수는 30대가 879만6651명(25.1%)으로 가장 많았지만, 실제 투표자수는 40대가 598만5809명(24.1%)으로 가장 많았다.

마음은 진보인데, 몸은… = 참석자들은 다들 자신이 보수화됐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씩 달랐다. 성동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김용일씨는 “마음 속으로는 아직 진보와 발전을 생각한다”면서도 “머릿속 마인드는 386인데, 실제 행동은 보수적으로 바뀐 듯하다”고 털어놨다. 서초구에 살고, 부동산업을 하는 정수호씨도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며 “하지만 이제는 입장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김동삼씨는 “우리 젊었을 때는 개혁은 군사정부에서 민간정부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개혁하면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며 “무엇을 바꾸자는 것인지 혼란스럽다”고 개혁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노무현, 그에 대한 애증 = 이런 40대의 이중적 태도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실망, 평가와 비난으로 뚜렷이 드러났다. 노 대통령의 정치력에 대한 40대의 평가는 후했다. 비교적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 정수호씨도 “정치는 노 대통령이 가장 잘 한 것 같다”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투명해졌는지 생각해 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살림살이’였다. 40대들은 ‘문제는 경제’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92년 미국 대선에서 40대의 빌 클린턴이, 60대의 아버지 조지 부시를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아.’(It’s economy, Stupid!) 라고 비꼬았듯이. 정수호씨가 노 대통령에게 준 국정 점수는 30점이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점수를 줬다.

강서구에 사는 사무직 이재형씨는 “저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을 찍었고, 집권 이후 좋게 바뀐 것도 많다”면서도 “문제는 지금 국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고, 고달프니까 잘한 것도 같이 묻혀 버리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여성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 ‘여성 정치인 시대’에 대한 평가도 뜻밖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남성들의 말문이 한꺼번에 터졌다. 김용일씨는 “거부감이 없다, 세계적인 추세”라고 했다. 최동선씨도 “미국은 3분의 1 이 여성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정수호씨는 “정치도 어떻게 보면 서비스인데, 서비스는 여자가 더 잘한다”고 거들었다. 김동삼씨도 “그동안 우리나라 여성의 힘이 많이 축적돼 드디어 힘을 발휘한다”고 평했다.

다시 ‘그렇다면 박근혜씨가 대선에 나오면 찍겠느냐’고 물었다. 김용일씨는 역시 “거부감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동선씨는 “카리스마가 없다”고 다른 생각을 밝혔다. 김용규씨도 “서울시장은 여자여도 되지만, 군사·외교와 같은 어려운 선택이 많은 대통령을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거기까지가 한계일까?

토론을 주관한 리서치플러스의 임상렬 대표는 “40대들이 양면성을 보이는 이유는 김영삼 정부 이래로 계속된 개혁에 대한 실망감으로 더 이상 자신의 현실을 담보로 미래에 ‘베팅’할 자신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마음 속에는 아직도 ‘386 마인드’를 지니고 있지만,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개혁을 외치는 정부에게 기대와 희망을 걸기엔 불안하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 / 이태희 기자 200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