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의무수입량은 매년 늘어가는데…

쌀 시장개방
관세화 유예조건 때문에 개방 후에도 영구히 의무량 구매해야
일본은 관세화 수용 뒤에도 쌀 시장 건재... 대만은 쌀값 폭락

지난 3월 23일 미국산 식용 쌀(1등급 칼로스 쌀) 1372톤을 실은 배가 부산항에 입항했다. 가공용이 아닌 식용 쌀이 수입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지난해 쌀 관세화(수입 자유화)를 10년간 유예 받는 조건으로 매년 일정량의 식용 쌀을 10년간 의무수입하기로 한 WTO(세계무역기구)와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4월 10일경부터 소비자에게 판매될 이 쌀은 한국의 쌀 시장에서 미국산 쌀이 얼마나 먹힐지 가늠하는 첫 시험이 된다.

농민들은 이날 부산항에서 쌀 하역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농민들은 작년 연말에 “관세화를 유예 받은 것은 잘 했지만 대신 (식용 쌀 수입을 포함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협상안”이라며 국회의 쌀 관세화 유예 비준동의안을 반대했다. 그러나 어쨌든 비준안은 통과됐고 수입 쌀은 올해에만 21만5000톤(그 중 식용 쌀은 5만7000톤)이 들어올 것이다.

‘쌀 수입을 10년간 유예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수입 쌀이 들어오는 거지’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정부가 ‘의무수입물량’(MMA:최소시장접근물량)이란 관세화 유예의 조건을 제대로 홍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무수입물량이란 WTO에 가입한 국가가 농산물 시장 개방을 늦추는 대신 농산물 수출국으로부터 의무적으로 사야 하는 곡물의 일정량이다. 그런데 이 의무수입물량이 개방을 늦출수록 이자처럼 불어나게 정해져 있다. 가령 우리나라가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직후에 쌀 수입을 개방했더라면 의무수입량은 없었을 것이지만 이미 10년간 미루었기 때문에 의무수입물량은 우리나라 1년 쌀 소비량의 4%(21만5000톤)로 늘어났다. 의무수입물량은 매년 0.4%씩 늘어나서 2년 후에는 4.8%를, 2014년에는 8%를 수입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이라도 ‘쌀 시장을 개방하겠다’고 관세화에 동의해도 의무수입물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의무수입물량이란 개방 유예에 따른 일종의 보상이므로 쌀 수입을 개방하는 순간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이중부담이 되는 셈으로,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의 윤석원 교수는 “미국 등 WTO를 주도하는 소위 강대국이 만든 강매(强賣) 조항”이라고 MMA를 비난한다.

만일 올해 당장 쌀 시장을 개방해도 한국은 영구적으로 매년 21만5000톤의 쌀을 사들여야 한다. 2014년에 개방하면 매년 그 두 배인 43만톤을 사야 한다. 돈으로 따지면 1조원에 가까운 액수다. 그래서 “어차피 개방할 거라면 차라리 빨리 개방(관세화)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2014년까지 쌀 수입이 보류되면서 쌀 농가는 일단 한숨 돌렸다. 하지만 의무수입물량이 늘어나 국가 전체로는 부담이 더 커졌다. 정부가 관세화를 유예시킨 이유는 당장 쌀 농가를 보호하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장차 쌀의 관세율을 결정지을 DDA(도하개발아젠다:우루과이라운드 이후 WTO의 새로운 다자간무역협상을 일컫는 명칭) 협상이 미결상태였기 때문이다.(DDA는 작년 홍콩 각료회의 때 관세율을 포함한 세부원칙이 결정되지 않아 여전히 보류된 상태다.) 만일 한국의 쌀 관세율이 현행세율인 400%에 가까운 300% 안팎으로 결정된다면 수입 쌀의 가격이 높게 책정되므로 개방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만, EU가 주장하는 150%나 미국이 주장하는 70%로 결정되면 국내 쌀의 가격경쟁이 불가능해지므로 농가의 파산을 막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부는 ‘1~2년 후(의무수입물량은 0.4~0.8% 더 오르겠지만) DDA 협상의 결과에 따라 관세화로 갈 것인지, 계속 유예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향후 DDA 협상에서 한국이 지금의 개발도상국 지위를 그래도 유지해서 높은 관세율을 획득하면 정부가 관세화를 앞당기려 할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한국은 DDA에 임하면서 가능한 한 ‘불쌍한 나라’로 보여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한·미 FTA 체결을 서둘러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충북대 성진근 교수는 “만약 한·미 FTA가 타결되면 미국과 직접교역을 할 정도의 국력이 인정돼 선진국 지위를 받게 될 것”이라며 “정부가 왜 한·미 FTA를 서두르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과 대만의 경우를 보자. 두 나라는 모두 의무수입물량의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일찌감치 관세화를 결정했다. 일본은 사실 농민의 반대 때문에 관세화 유예로 출발했지만 쌀 시장을 개방해도 승산이 있었다. 일본이 쌀 시장을 개방한 1998년 당시 쌀 관세율은 1200%나 돼 수입 쌀이 가격 경쟁에서 일본 쌀과 대적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일본은 1970년부터 35년 동안 쌀의 고급화를 이뤄왔기 때문에 일본 소비자는 일본 쌀만 고집하는 성향이 강하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관세화를 택해 성공했다.(그러나 일본도 오는 DDA 협상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미국, EU, 호주 등 쌀 수출국이 관세율 상한을 100~150%로 주장하고 있는데 만일 그 관세율대로 결정되면 일본 쌀 농가는 큰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대만은 관세화를 받아들여 실패했다. 대만의 관세율도 560%로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자국의 쌀 품질이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수입 쌀이 장악하고 쌀값이 폭락했다. 한국이 쌀을 개방할 경우 일본과 대만 중 어느 케이스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열쇠는 결국 한국 쌀의 품질이 쥐고 있다.

성난 우리 농민은 “선진국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WTO를 탈퇴하라”고 하지만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가 GNP 비중이 3.9%인 농업을 위해 WTO를 탈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해답은 한국의 쌀 농업이 빨리 국제경쟁력을 길러서 관세화를 선언하고, 사채이자처럼 불어나는 의무수입물량을 스톱시키는 것이다. 과연 한국 농업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가?

일단 지금의 성적표는 우울하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정부는 57조원을 농촌에 투자했지만 결과는 농산물 무역적자 1.5배 증가, 농가부채 3배 증가, 농가인구 30% 감소로 나타났다. 그래서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직후만 해도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던 국민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고 “농업도 이제 구조조정해야 한다. 농민만 시장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냉정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농경제학자들은 “한국의 농업은 우리 경제의 걸림돌이 아니라 희생양이었다”며 “농업을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성진근 교수는 “WTO 체제의 자유무역이 한국이 IMF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회생은 농산물 수입에 의한 농민 희생을 발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농민에게 그만큼의 보상과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학자들은 “10년의 관세화 유예 기간을 두고도 체질 개선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만 10년이란 농업에서 결코 넉넉한 기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은 30년 이상 농업 개선에 투자했지만 한국처럼 국제경쟁에서 고전하고 있으며, 10년간 57조원이란 액수도 미국의 1년 농업보조금인 72조원과 비교하면 적은 액수다. 또한 지난 10년은 쌀 외의 농산물은 모두 수입돼 시장이 무너진 상태였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민승규 수석연구원은 “농업을 시장경쟁 속에 방치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농업은 산업특성상 수익성·안정성·성장성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농업은 자연조건에 대한 의존성이 깊고 투자회수기간이 길며 위험성이 높다. 시장경제논리로만 따진다면 농업이 설 땅은 없기 때문에 각 정부는 보상적 지불수단을 통해 농업생산활동을 장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농민은 소득의 50%를, EU의 농민은 소득의 70~80%를 국가보조금으로 받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싼 값에 곡물을 출하할 수 있는 것이다.

민 연구원은 쌀을 포기해선 안 되는 이유로 ‘식량 위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세계적으로 곡물 소비량은 연간 2%씩 늘어나는 데 비해 곡물 생산량은 0.7% 성장을 보이고 있어 이 추세대로라면 20년 후에 심각한 식량위기가 닥친다는 전망이 각국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과 유럽이 막대한 돈을 농업에 지원하는 이유는 장차 곡물이 가장 비싼 교역물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라면 모를까 인구 수천만의 나라가 식량자급을 포기한 예는 없다. 향후 미국과 패권을 다투게 될 중국도 식량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민 연구원은 말했다.

중앙대 윤석원 교수는 “농업을 시장경쟁에 방치하는 정부는 지구상에 없다”며 “정부는 소득보전 직불제(정부가 쌀값 하락으로 인한 농가 손실을 보상해주는 제도로 한국은 2002년부터 시행)를 강화해 중소농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식량안보와 환경보전 차원에서 농업을 보호육성하고 있다. 누구보다 자유무역의 덕을 많이 본 일본도 자유무역체제에 위배된다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며 고액의 소득보전금을 농가에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 허만갑 기자 2006-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