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집으로 변한 삼국시대 고분

경북 영주 ‘문화재 수난’ 현장을 가다
야산 주변엔 덮개돌 나뒹굴고 고분 보호표지판 조차 없어…
국가가 ‘도굴같은 발굴’ 한 셈

동양대(경북 영주시) 이한상 교수(고고학)는 최근 이 지역 향토사학자 박석홍씨로부터 눈이 번쩍 띄는 제보를 받았다. “영주시 순흥면에 삼국시대 벽화고분이 있다!” 촌로들은, “일제 때 이미 도굴됐다는 사실이 마을 주민들에게 발견됐고, 6·25 때는 무덤 안 돌방(石室·석실)으로 피신까지 했다”는 증언까지 하고 있었다.

순흥지역은 1970~80년대 발굴된 2기의 벽화고분과, 1985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벽화고분 주변의 고분 몇 기를 추가로 발굴한 것 외에는 제대로 발굴한 적이 없는 ‘고고학 불모지’. 이교수는 문화재학과 동료인 노대환·성형미교수, 그리고 학생 10여명을 이끌고 ‘고분 벽화 발견팀’을 구성했다. 탐사 당일 오전 7시부터 이들은 순흥면 읍내리와 태장리 일대 야산을 샅샅이 살폈다.

북한과 만주에는 고구려 벽화고분이 모두 90여 기 이상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한지역에는 순흥의 2기를 포함, 삼국시대 벽화고분이 4기 뿐이다. 학계에서는 순흥면 벽화고분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했던 서기 5세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탐사 2시간여만인 오전 9시. 이교수팀은 읍내리 야산에서 석실 천장을 이루는 큰 덮개돌이 무덤 주변에 나뒹구는 고분(5세기 무렵)을 발견했다. 크기 40~50㎝로 다듬은 돌을 잘 축조해 쌓은 석실이었지만, 흩어져 있는 덮개돌이나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방(현실·玄室) 바닥에 쌓인 흙을 통해 볼 때 도굴된 것처럼 보였다. 벽화는 없었다. 그러나 무덤 내·외부를 살피는데 봉토 중간에 비닐이 한 겹 덮여 있음이 드러났다.

이상했다. 비닐은 무덤 보존을 위한 조치인데, 설마 도굴꾼들이 그런 일을 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예감으로 1985년 문화재관리국 발굴 기록을 살펴 보니, 당시 발굴한 뒤 ‘고분 3호’라고 명명했던 무덤이었다. 발굴 후 대충 흙을 덮었는데, 빗물에 흙이 쓸려 내려가면서 고분이 흉한 상태로 드러난 것. 문화재관리국은 고분임을 알리는 보호 표지판조차 남기지 않았으며, 덮개돌조차 제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다. 국가가 ‘도굴과 다름없는 발굴’을 한 셈이다.

오후 1시 순흥면 청구리 원단촌마을. 크기 3m 이상인 무덤 덮개돌 3개로 천장을 이룬 고분(5세기) 한 기. 봉분 둘레가 30m 이상은 됐을 법한 큰 규모로,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고분은 그러나 반쯤 헐려 무덤방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한때 시신이 놓였을 자리에는 개집이 대신 들어서 있었다. 암캐 한마리가 ‘자기 집’을 찾은 15명쯤 되는 낯선 사람들의 위세에 눌렸는지, 개집에 틀어 박혀 꼼짝을 안 했다. 무덤방 벽체를 이루는 돌들도 바로 옆에 붙은 민가의 담장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이어 찾은 순흥면 내죽리의 야산. 장군총(장수왕릉 추정)에서나 볼법한 길이 2m30㎝, 너비 1m30㎝, 두께 30㎝되는 통돌로 만든 시상(屍床·시신을 안치하는, 침대처럼 생긴 돌)이 놓인 석실무덤이 있었다. 역시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무덤이다. 이교수는 “당장 문화재로 지정해도 될만한 귀족 이상의 무덤”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무덤 역시 도굴로 무덤 벽이 허물어져 있었다. 무덤 바닥에는 물이 10㎝ 가량 차 있었다. 박석홍씨는 “허물어진 무덤 벽 사이로 빗물 등이 스며 들어 여름이면 고분 안에 물이 꽉 찬다”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옻물탕’이라고도 하는데, 여름이면 고분 옆에 가림막을 치고 양동이로 물을 퍼다가 목욕을 하면서 피부병 등을 치료한다”고 했다.

이날 이교수팀은 도굴범들이 남긴 한 되짜리 소주병이 여전히 놓인 고분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순흥지역이 문화재 관리의 사각지대라는 소문이 나면서 ‘합법적인 도굴’까지 판을 치고 있다. 야산 소유주들이 ‘분묘 이장(移葬)’을 한다고 공고를 낸 뒤, 삼국시대 무덤에 분묘 이장 안내판을 꽂아 놓는 것. 삼국시대 무덤에 연고자가 있을 리 없으니, 무덤을 이장한다며 고분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교수팀도 이날 ‘분묘 이장 안내’가 꽂힌 삼국시대 무덤을 5기 정도 목격했다. 이 교수는 이날, 벽화고분을 결국 찾지 못했다.

(조선일보 / 신형준 기자 200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