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안보기 16개월 과천 혜원이네 “TV 끄니 다른세상이…”

혜원(慧援·13·여)이네 집에는 TV가 없다. TV가 있어야 할 거실의 긴 소파 앞에는 대신 커다란 책장과 온 가족이 나무 블록을 하나하나 쌓아 만든 이층집 모형, 그리고 기타 한 대가 놓여 있다. 혜원이네 식구들은 TV를 보는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본다. 중학생인 혜원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한참 어린 여동생 혜민(慧敏·7), 남동생 혜성(慧性·4)이와 퍼즐을 맞추거나 노래하거나 춤추면서 논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 과천시 중앙동 집으로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삼남매가 플라스틱 블록으로 멋진 로봇을 만들고 있었다. 날이 어둑해지자 아버지 이윤식(李潤植·44·회사원) 씨가 돌아왔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 씨는 기타를 들고 소파에 앉아 ‘아빠와 크레파스’를 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혜원이네는 EBS가 2004년 12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20일간 TV 끄고 살아보기’에 참여하면서 TV를 없앴다. EBS가 방송 후 1년이 지나 참여 가족들을 대상으로 후속 인터뷰를 한 결과 혜원이네는 당시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131가구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TV 없이 사는 가족으로 확인됐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혜원이에게 ‘TV 그만 보고 숙제부터 하라’고 했더니 의자를 발로 차며 반발하더군요. EBS에서 TV 끄고 사는 프로그램 참여자를 모집한다기에 좋은 기회다 싶어 아예 TV를 복지시설에 주어버렸어요.”(어머니 최효선·崔孝善 씨·41)

TV 스케줄에 맞추어 하루하루를 살던 가족들은 TV가 없어지자 공황상태에 빠졌다. 채널을 바꾸어 가며 뉴스 스포츠 바둑 프로그램을 섭렵하던 아버지, 밤늦도록 드라마에 빠져 있던 어머니는 대화를 시도했지만 대개는 말다툼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금단 증세는 2주를 넘어가지 않았다. 둘째와 막내는 책을 집어 들었고 엄마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혜원이는 동생들과 뒤엉켜 뒹굴거나 소곤대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이웃에서 버린 침대 매트용 나무를 주워와 슥슥 톱질하고 뚝딱뚝딱 망치질해서 아이들의 책상과 발판, 신발장을 만들었다.

궁금한 정보는 신문에서 얻는다. TV 뉴스가 자극적인데 비해 활자는 차분해서 좋다.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조르거나 아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해도 ‘저 프로만 끝나고 시간이 나면 하자’고 미뤄두었죠. 그런데 TV를 치우기 전까지는 결코 그런 시간이 오지 않았어요.”(아버지)

“TV 볼 때 동생들이 말 시키면 짜증내고 때리기도 했어요. 아빠도 누워서 TV만 보셨고요. 지금은 아빠가 부지런해졌어요. 옛날에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 표정들이 차가운데 요즘은 다들 웃고 있어요.”(혜원)

봄기운이 완연한 이번 주말 혜원이네는 관악산에 오를 계획이다.

(동아일보 / 이진영 기자 2006-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