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보다 강한 무기… ‘자원 패권’ 다툼

1월 1일 오전 10시 러시아의 국영가스회사 가스프롬은 우크라이나행 가스관의 밸브를 잠갔다.

우크라이나가 가스 가격을 기존의 4배로 올리기로 한 인상안을 거부하자 가스프롬이 공급을 아예 끊어버렸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가스관의 종착지인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유럽이 한겨울에 가스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난방용 가스를 러시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서유럽은 가스 도입 물량의 60∼80%를 우크라이나 가스관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정초부터 세계 에너지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가스 가격이 폭등하고 유가까지 덩달아 들썩이면서 각국이 대책 마련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가 가스프롬의 요구를 나흘 만에 받아들이면서 잠잠해졌다. 하지만 전 세계 국가들에는 에너지 무기가 냉전시대 핵위협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뼈저린 ‘교훈’이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문배 연구위원은 “세계의 원유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추가생산능력은 한계에 봉착해 국제 에너지가격이 구조적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면서 “자원을 지키려는 국가와 어떻게든 개입하려는 국가들 사이의 자원 전쟁은 더욱 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중국, 포기 않는 해외 자원 사냥

2004년 중국은 카자흐스탄 카샤간 유전의 지분을 매입하려다 서방의 반대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카샤간 유전은 카자흐스탄에서 탱기지 유전에 이어 매장량이 두 번째인 대표적 유전으로 이탈리아의 에니사 등 서방 자본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영국 석유메이저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지분을 중국에 팔려고 했다가 다른 메이저들의 반대로 무산된 것.

중국은 1996년부터 해외 유전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는 규모가 작은 마이너리그에 불과했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던 계획이 서방의 견제구에 걸려 좌절된 첫 사례다.

중국에 대한 메이저업체들의 견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국해양석유유한공사(CNOOC)가 지난해 6월 미국의 9위 석유회사인 유노칼을 인수하려다 미국 의회의 반대로 좌절됐다.

또 이에 앞선 2005년 초 러시아 정부가 민간석유회사인 유코스를 국유화할 당시 중국은 유전 확보를 목표로 50억 달러의 거금을 빌려줬지만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보장받는 데 그쳤다.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유전개발 참여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제는 서구 자본이 개입을 꺼리고 있는 수단, 나이지리아, 앙골라 등 아프리카 오지에 진출하고 있는 것. 정정이 불안한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산유국 진출도 꺼리지 않고 있다.

중국은 한 해 석유수입물량의 30%를 아프리카에서 수입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이준범 조사연구팀장은 “2003년부터 고유가가 시작되면서 중국의 해외 유전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들인 노력에 비하면 성과는 별로”라면서 “에너지 확보, 서구의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중국에 블록화로 맞서는 서방자본

거대한 에너지 블랙홀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등 개발도상국에 대해 서구의 메이저 업체들은 블록화로 공동 대응하고 있다.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등 유전이 몰려 있는 지역이 한결같이 정정과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에 서방기업이 공동으로 들어가 유사시 공동 대응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또 이들 지역에서 미국 등 서구 자본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자원개발의 무게중심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와 동시베리아의 대형 유전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도 최근 추세다.

이와 함께 일본이 이라크전쟁 참전을 계기로 미국의 묵인 하에 중동 등 유전지역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일본은 2004년 2월 매장량이 260억 배럴로 추정되는 이란 아자데간 유전의 독점 개발권을 따낸 데 이어 최근에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카자흐스탄의 카샤간 유전, 아제르바이잔의 쿠르다시 유전의 지분도 매입했다. 일본은 또 지금까지 종합상사가 주된 역할을 해온 해외 자원개발 사업을 에너지전문개발기업에 넘기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기술력을 갖춘 사이코쿠석유와 자산규모가 큰 인펙스를 합병해 서구 메이저 기업에 견줄 만한 대형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것.

석유공사 이 팀장은 “최근 세계의 에너지 자원 확보 경쟁은 수요 공급이 불균형을 이룬 데다 에너지 자원이 중동 등 지역적으로 편재돼 있기 때문에 생기는 구조적 문제여서 구조의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자원확보 경쟁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창원 기자

▼ 바람… 태양열… “석유를 넘어라” ▼

해외 유전 개발이 세계 에너지 안보정책의 큰 축이라면 신·재생에너지 개발은 일부 선진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다.

신·재생에너지는 연료전지 등 신에너지와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나뉜다. 연소할 때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아 ‘환경친화적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개발 분야에서 가장 앞서 가는 곳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EU). EU는 2010년까지 전체 에너지소비량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12%까지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EU의 친환경에너지 모범국인 스웨덴은 앞으로 15년 내에 석유의존을 완전히 끊겠다고 공언했을 정도다.

석유수입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석유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석유중독증에 걸린 나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 미국도 올해 초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신에너지정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태양에너지, 풍력, 바이오연료 및 청정석탄 개발에 내년 한 해 동안 10억 달러(약 1조 원)를 투입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

미국은 또 2002년부터 수소연료전지 개발에 착수해 내년까지 총 17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다.

세계 설비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태양광 분야에서 주도권을 확보한 일본도 연료전지 기술 개발과 보급에 총 15조 원 이상의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뒤늦게 뛰어든 한국은 2004년 ‘신·재생에너지 원년’을 선언하며 관련 기술개발과 보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직 전반적인 기술 수준이 선진국의 50∼70%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최근 수소연료전지, 풍력, 태양광 분야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수소연료전지는 기술력이 가장 앞서 있는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고 태양광 역시 선진국 기술력의 80%에 육박했을 정도. 대기업들이 최근 연료전지와 태양광 사업에 의욕을 보이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부의 투자지원이 선진국의 10%에도 못 미치는 것은 아쉬운 대목으로 꼽힌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과 일본의 신·재생에너지 정부 투자액은 각각 35억 달러와 21억 달러지만 한국은 1억 달러에 머물고 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복영(朴馥永) 부연구위원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소득 2만 달러대에 진입하면서 석유소비량이 정체하거나 감소하는 추세”라면서 “석유소비를 계속 늘리면서 유전을 확보하는 전략보다 석유소비를 줄이고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이 최근 선진국형 에너지 안보정책”이라고 설명했다.

김창원 기자

(동아일보 2006-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