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밀리고 치이고…"뭘 위해 살았나" 우울한 자화상

창간 40주년 특별기획 / 위기의 40대

◆ "나이 마흔 넘어 세상을 산다는 건/석양빛 붉은 울음을 제 뼛속마다 고이/개켜 넣는 거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밤새 안녕하였다는 눈인사를/저 스스로에게 묵묵히 건네며/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58년생' 개띠 시인 이철승(48)이 그리고 있는 40대의 자화상이다. 시인은 "나이 마흔이면 길가에 침을 뱉어도 외롭다"는 한마디로 40대의 고독을 명징하게 표현했다. 처량한 마음을 넥타이로 단단히 졸라매어 보아도 길을 걷는 40대의 뒷모습은 허전하기만 하다. 그래도 터벅터벅 걸을 수밖에 없다. 아이가 있고, 부인이 있고, 무엇보다 아직 살아온 시간만큼 남아 있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 아이들 = 2년 전 자녀 둘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정 모씨(47ㆍ사업)는 아이들과 함께 간 아내가 '아예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이민을 오라'고 자꾸 조르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그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필요한 시기인데 혼자 지내는 생활이 갈수록 힘들다"며 "다행히 8년 전 장만한 강남 아파트 가격이 2배 가까이 뛰어 이민 자금으로 충분할 것 같다"고 말했다.

40대의 '기러기 아빠' 행렬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일부 전문직에 한정됐으나 요즘에는 평범한 회사원인 '예비' 기러기 아빠들이 넘쳐나는 실정이다. 현재 조기 유학중인 초ㆍ중ㆍ고교생은 대략 2만명이 넘는다. '조기 유학'까지는 결심하지 못해도 아이들을 위한 사교육비는 40대를 짓누른다. 40대 중년 전문 사이트인 '피플475'(www.people475.com)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김규익 씨(48)는 "월 수입의 절반 이상인 250만여 원이 두 자녀의 교육비로 지출된다"며 "아이들도 잘 키우고 말년에 편하게 지내고 싶은 40대들의 발목을 붙잡는 가장 큰 요인이 사교육비"라고 말했다.

한국은행 추정에 따르면 2004년 기준 국내 사교육비 규모는 연간 7조9000억원에 달한다. 가구주 연령 기준으로 보면 가계 소비지출의 20%(자산운용업계는 40%까지 추정) 이상을 차지하는 교육비 지출 비중은 40대에 가장 높고 50대 이후 급감하는 추세를 보인다.

지난 7일 발표된 통계청의 '근로자 가구 월평균 가계수지'에 따르면 가계지출 항목에서 교육비는 자녀가 중ㆍ고교에 다니는 40대 후반이 42만8000원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자식을 위해 인생을 '올인'하는 40대들의 과잉 투자를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가 경험한 '과밀과 과잉 경쟁'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40대는 비록 콩나물 교실이긴 했지만 광복 후 체계적인 교육을 처음으로 받은 세대다. 이들이 초등학생이던 65~68년 초등학교의 학급당 인원은 65명에 달했다. 경쟁이 심하다 보니 재수생이 누적되고 고액 과외가 등장하기도 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인생의 낙오자로 분류되고, 학벌주의가 심화되는 과정을 경험한 40대가 자녀 교육에 더 집착하고 교육비를 다른 세대보다 더 많이 지출한다"고 말했다.

◆ 인생 2막 = "40대에 접어들고 보니 한 가지 인생목표만 세워놓고 살아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30대에 10년을 내다보고 인생 목표를 하나 더 설정하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2년 전 사업체를 그만두고 일식집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박 모씨(41)는 "인생 후반전을 30대부터 준비하라"고 말했다.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다 최근 감정평가사로 전업에 성공한 이병수 씨(46)는 "40대에 명예퇴직 같이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갑자기 닥치면 적지 않은 혼란을 겪게 된다"며 "차라리 오랫동안 자발적으로 새로운 일을 준비하면 충격이 훨씬 덜하다"고 말했다.

평범한 40대 직장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퇴직 후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는 것이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소장은 "수명 연장 시대에 40대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변곡점이 되고 있다"며 "50대가 되면 뭔가 다시 시작하기에 늦기 때문에 늦어도 40대 중반에는 적극적으로 인생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40대(남성)는 올 1월 기준 전체 경제활동 인구 중 27.2%를 차지해 30대(26.7%)를 추월했을 만큼 비중이 높은 집단인 동시에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인한 실업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는 세대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40대의 교육수준이 높고 산업구조도 고령자 진입이 수월한 서비스업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어 이들의 퇴장 시기가 뒤로 미뤄질 수 있다는 분석도 조심스레 내놓고 있다.

◆ 외로움 = IT업계에 근무하는 이창규 씨(가명ㆍ46)는 "젊은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사회가 그걸 인정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선호하니 마치 40대가 불필요한 세대처럼 느껴져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는 "가정에선 가부장적 권위가 사라지고 가족의 중심추가 온통 아이들 교육에만 쏠려 있으니 가장으로서 존재감을 느끼기 힘들다"며 "그 동안 뭘 위해 열심히 뛰어왔는지 회의가 들 정도"라고 푸념했다. 최근 들어 이씨처럼 고용ㆍ노후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가족 해체 현상 등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을 호소하는 40대들이 급속히 늘고 있다.

대기업 차장인 홍 모씨(43)는 "우리 사회가 40대들이 겪는 정서적인 혼란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교육, 부모 봉양, 간부급 사원으로서 겪는 고민 등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옥이 남성의 전화 소장은 "과거에는 40대가 안정권에 속했으나 조기 퇴직 등으로 눈 깜짝할 새 밀려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이유 없이 쫓기는 듯한 불안감과 공허함을 호소하는 40대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40代 벌써 체념에 빠졌다

철도공사 간부급 팀장으로 근무하는 김현철 씨(가명ㆍ48)는 최근 고등학교 친구들 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운동회 때 자전거를 타고 '누가 더 천천히 가나' 내기를 하곤 했잖아. 요즘 우리 가 딱 그 모양이야. 일찍 성공한 친구들은 명예퇴직 당해 놀고 있고, 승진 못해도 회사에 오랫동안 붙어 있는 친구들이 오히려 더 낫단 말이야."

"맞아, 후배에게 밀리거나 상사에게 치여도 회사에 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어. 한 달 교육비만 150만원에다 돈 들어갈 곳이 수두룩하니 마냥 불안하기만 하지…."

"예전엔 회사에도 암묵적인 질서란 게 존재했잖아. 요즘 젊은 후배들은 그런 권위 를 인정하질 않아. 처음엔 화도 나고 황당했는데 요즘은 그냥 체념하고 지내는 거 야."

한국의 40대가 흔들리고 있다. 고령화사회와 구조조정의 그늘 속에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위기감은 사회 곳곳에서 감지된다.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의 붕괴로 곳곳에서 '가족 해체' 현상이 목격된다.

국가와 회사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지만 사회ㆍ경제적인 지위는 갈수록 불안 하다. 일부는 조기ㆍ명예퇴직으로 물러나면서 '신(新)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인생 2막'을 위한 준비도 말처럼 쉽지 않다. 이 때문에 한 40대는 스스로를 '방향감각을 상실한 세대'로 불렀다.

오퍼상을 운영하는 김규익 씨(48)는 한국의 40대를 "외환위기를 겪으며 스스로 평가한 '자기'와 사회가 평가한 '자기'간의 엄청난 괴리를 경험한 세대"라고 평가했 다.

외국계 기업에서 연봉 6000만원을 받던 류 모씨(40)는 지난해 과감히 사표를 내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중이다. 류씨는 "직장생활을 10년쯤 했지만 집 한 채 팔고 사는 법조차 모를 정도로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느꼈다"며 "사회가 결코 개인의 인 생을 완성시켜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마흔쯤에 새 일을 찾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40대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에는 역시 '돈'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무엇 보다 자녀 교육비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고, 외부적으론 '중산층 몰락'과 사회 양극화 현상이 사정없이 이들을 옥죄고 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인 40대는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부모 세대의 부양은 물론 자신들의 노년과 자녀 교육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일 발표된 통계청의 '근로자 가구 월평균 가계수지'에 따르면 가계지출 항목 에서 교육비는 40대 후반이 42만8000원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의 40대는 가정에서도 '낀 세대'다. 부모 부양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노후를 의지하지 않는 첫 세대란 의미다.

한 40대 가장은 "40대는 아버지 세대에게서 물려받은 가부장적인 가치가 몸에 배어 있지만 가정에서는 선진국형 남편, 친구 같은 아버지상을 요구받고 있다"며 "양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중년 가장이 의외로 많다"고 말했다.

한경혜 서울대 교수는 "40대 중년은 인생의 '프라임 타임'이지만 내리막길에 대한 생각이 들고 불안정성도 심해지는 시기"라며 "우리 사회의 중추 구실을 요구받지만 빠른 속도로 다음 세대에게 밀려나 경제ㆍ사회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박탈감과 소외 감이 커지고 정체성 위기 또한 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40대, 교육비 대느라 노후준비 엄두못내

고령화사회는 40대에게 '위기'이자 또 다른 '기회'로 여겨진다. 지난 1월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고령화 영향으로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40대 비중이 처음으로 30대를 추월했다.

이는 국민 전체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 경제활동의 주역이 30대에서 40대로 교체 됐음을 의미한다. 통계청 관계자는 "2016년을 정점으로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기 때문에 중(中)고령층이 경제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40대가 산업화 시대와 2030세대를 중재하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고령화사회의 주도세력으로 나선다면 향후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짓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본격적인 고령화 사회를 맞는 40대의 노후 대비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국민연금연구원에 따르면 현재 40대 가운데 2030년 국민연금을 타는 비율은 48.32% 에 불과하다. 금융회사의 개인연금을 타는 비율은 10.4%이다. 40대 대부분이 별다른 노후 대책이 없다는 의미다.

한국 사회가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차세대 교육과 부모세대 부양을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 갈수록 커진다는 점도 노후 대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전망이다.

김명수 기자 / 박승철 기자 / 안정숙 기자

(매일경제 2006-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