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기 ①

문명과 야만 사이의 파시즘

얼마 전 유럽 연합 의장 취임식에서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자신을 ‘마피아’로 비난한 독일 출신 유럽 의회 의원을 ‘나치’ ― 더 정확히는 영화 속에 나오는 야만적인 나치 수용소의 간수 ― 에 비유하여 큰 물의를 빚고 있다. ‘나치’가 ‘마피아’보다 훨씬 심한 욕이라는 것이 새삼 입증된 셈이다. 비록 베를루스코니가 국외에서 ‘나치’라는 말을 욕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국내에서 ‘포스트파시스트들’을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연정의 핵심 세력인 국민동맹은 파시스트 국민당을 계승한 이탈리아 사회운동당의 후신이며, 그 지도자 잔프랑코 피니는 한때 베니토 무솔리니를 “20세기 최고의 정치가”로 추켜세워 화제가 된 인물이다. 하지만 피니도 ‘파시스트’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웠던지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죽은 독재자의 손녀이자 당내 2인자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와 그녀의 추종 세력이 반발하여 전격 탈당한 뒤 사회대안당을 결성했다. 물론 신당의 앞길도 평탄치는 않다. 올해 초 로마 법원이 신당의 선거 참여 금지를 판시하자 무솔리니 여사가 이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렇다면 21세기 초입에 ‘포스트파시스트들’이 연출하고 있는 이 기이한 장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나치’와 ‘파시스트’는 오늘날 문명 세계로부터 추방된 인물이나 사태를 가리키는 정치 용어이다. 기실 그런 용어가 가리키는 것들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야만적인 과거의 잔재이다. 둘째, ‘나치’와 ‘파시스트’는 오늘날 정치 현실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재기하고 있다. 실상 그들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들에서 이미 권력의 핵심에 도달했다. 그런데 여기서 파시즘이 추방되었다는 사실과 파시즘이 재기했다는 사실은 일견 모순된다. 그러나 잘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도리어 전자가 후자의 조건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무슨 뜻인가 하면, 파시즘은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기했지만, 그와 동시에 추방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재기할 가능성이 컸다는 말이다. 이는 분명 역설이다. 이제 그런 정치적 역설이 어떻게 가능한가, 또 그런 역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일련의 의문들을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온상이었던 이탈리아의 역사를 통해 풀어보려 한다.

제2차 대전이 추축군의 패배로 끝난 뒤, 파시즘은 현대 문명의 정치 세계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었다. 그리고 추방 작업은 이미 다양한 반파시스트 지식인들에 의해 면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가령 이탈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베네데토 크로체는 파시즘의 대두를 야만인들의 침공 ― “힉소스의 침공” ― 으로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파시즘은 1차대전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출현한 기형물, 그러니까 “자유의 역사”로서의 이탈리아 근현대사에서 일종의 “막간극”이라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좌파 영화감독 주제페 데 산크티스는 <이탈리아 인들,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영화에서 제2차 대전 당시 순박한 농부 출신 이탈리아 병사들과 러시아 병사들이 나눈 교감을 묘사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이 영화의 메시지는 극소수 패륜적인 지도자들의 악행으로서 파시즘은 대다수 선량한 민중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크로체와 데 산크티스의 시각을 통해 보면, 파시즘은 일종의 B급 공포영화가 된다. 관객들은 좀비들이 절뚝거리며 추격하고 선혈이 낭자한 영화를 보면서 두려움에 떨지만 동시에 화면 속에서와는 달리 현실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사실 이 안전하다는 느낌이야말로 공포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진정한 쾌감이 아닐까? 파시즘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파시즘의 야만적인 폭력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이 면면한 문명사의 “막간극”이요, 소수의 악행임을 확인하며 도리어 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크로체의 자유주의와 데 산크티스의 사회주의는 대다수 이탈리아 인들을 위무해주기는 했지만 파시즘이 이탈리아 “역사의 발현”(귀도 도르소)이며 이탈리아 “국민의 자서전”(피에로 고베티)임을 간과함으로써 그들에게 진지한 반성의 기회를 주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파시즘이 추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추방되었기 때문에 재기할 수 있었던 사실을 설명해준다.

기실 파시즘의 본질은 제1차 대전이나 제2차 대전이라는 짧은 시간 폭에서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국가 형성(state-formation) 이라는 긴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립으로 결실을 맺은 19세기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의 역설은, 주제페 토마지 디 람페두자의 소설에 나오는 한 시칠리아 장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통일되고 난 뒤만큼 분열이 심한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통일은 문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를 당시 온건파 정치가 마시모 다젤리오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제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남은 일은 이탈리아 인들을 만드는 것이다.” 요컨대 신생 이탈리아 국가의 근본 과제는 국민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나아가는 것, 달리 말하면 국가와 국민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이 과정은 단지 법적 · 정치적 제도들을 구비하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전체 주민의 의식, 가치, 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거대한 문화 혁명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자유주의 엘리트들은 이와 같은 문화 혁명으로서의 국가 형성의 과제를 수행할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기껏해야 ‘이합집산(trasformismo)’ ― 뇌물이나 엽관을 통해 정치적 반대파를 매수하여 의회의 다수를 형성하는 관행 ― 이라는 거래 정치의 기술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자유주의적인 이탈리아 국가와 인구의 절대다수를 신도로 거느리고 있던 가톨릭교회의 불화는 ‘이탈리아적인 것’과 ‘국민적인 것’의 불일치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또한 자유주의 이탈리아에서 최대 정치 세력이던 사회주의자들도 국가 권력의 장악과 재편을 위한 실질적인 강령을 결여한 채 공허한 혁명적 수사 뒤에 몸을 숨기면서 협소한 계급적 · 부문적 이해관계의 정치에 갇혀 있었다. 이상으로부터 파시즘은 이탈리아 국가 형성의 논리적 귀결로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실패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소수의 악행으로 물든 야만의 “막간극” 쯤으로 치부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다. 파시즘은 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이 아니라 그 자체 문명의 일부이다. 그것도 국가 형성이라는 특정한 문명사의 일부이다. 그리고 국가 형성의 과정이 비록 다양한 형태를 띨지라도 이탈리아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라고 할 때, 파시즘의 가능성은 보편적이다. 이런 주장이 파시즘을 변호하는 논변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파시즘의 재기를 막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을 추방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파시즘을 어느 미국 첩보 소설의 기막힌 제목처럼 “명백한 눈앞의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으로 볼 필요가 있다. 마치 눈이 밝은 공포영화 감독이 익숙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잠재하는 공포를 끄집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장문석 서양사, 한양대 연구 교수>

(프로메테우스 2005-11-10)

[칼럼]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기 ②

수사와 현실 사이의 파시즘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인 정치적 위험임을 인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스트들의 이념 자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일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지금까지의 파시즘 연구들이 그것을 한낱 사기나 허풍쯤으로 치부한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탈리아 파시즘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말을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의 범주에서 탈락한 불운한(!) 체제이거나 적어도 “불완전한 전체주의”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도 아니요, 공산주의도 아닌 파시즘의 새로운 전체주의적 대안은 후대의 많은 연구들에서 “신화”라거나 “장광설”, 혹은 “화염이라기보다는 연기”라거나 “파시즘 체제라는 무거운 진흙 주전자에 달린 약한 손잡이” 정도로 폄하되어왔다. 그런가하면 거기에 더해 파시즘의 두체(Duce) 무솔리니는 화려한 전제 군주의 의상을 걸쳤으나 실은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부록처럼 따라붙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시스트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따라서 파시즘의 수사와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수사 자체가 현실의 일부이기도 하다는 점을 간과한다. 기실 당대인들의 눈에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수사는 현실적인 위협으로 비쳤다. 전체주의라는 말 자체도 파시스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한 사람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1923년 10월에 반파시스트 자유주의자 조반니 아멘돌라가 의회에서 다수파를 만들기 위한 파시스트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마도 처음으로 “전체주의적 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그 이후에 이 전체주의라는 말은 거꾸로 파시스트들에 의해 긍정적인 의미로 전유되었다. 그리하여 안토니오 그람시와 같은 당대 관찰자들에게 전체주의는 대체로 유일 정당의 권력 독점 아래에서 사회에 대한 국가의 획일적인 통제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이 그 정확성 여부를 떠나 필경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이다. 요컨대 ‘해석된 현실’이 ‘현실’ 그 자체를 규정한 것이다.

물론 이 말이 파시스트들의 전체주의적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듯이, 파시즘의 이상은 군주정, 교회, 군부, 대기업 등 강력한 기성제도의 견제와 저항에 부딪쳐 좌절된 것이 사실이다. 가령 파시스트들은 공공연히 반부르주아적 · 반자본주의적 수사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대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배반한 셈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파시즘의 전체주의를 현실과 동떨어진 수사로, 따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체주의를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장치인 ‘맥거핀’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남자가 스코틀랜드 행 기차 속에서 대화를 나눈다. ‘저 선반 위의 꾸러미가 뭐죠?’ ‘아, 그거요,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죠?’ ‘사자를 잡는 장치입니다.’ ‘스코틀랜드에는 사자가 없는데요.’ ‘아, 그런가요, 그럼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히치콕은 이 ‘맥거핀’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다. 네 남자가 포커판을 벌이고 있다. 그런데 관객들은 이미 테이블 밑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네 남자는 태평하게 포커를 즐긴다. 그러나 관객들은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차나 한잔 하러 가지’라고 말하고 곧 네 남자는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그 장소를 나온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 과정에서 엄청난 서스펜스를 맛본다. 결국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 것이다. 전체주의도 그와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혼란과 공포를 느낀 관객들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역사가들이 아니라 결말을 모른 채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기획은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실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수사적 차원에 국한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인들의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 그들을 압박한 ‘다모클레스의 검’이었다.

그런데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 독일에 이르면, 영상은 전연 달라진다. 이탈리아에서 전체주의가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희화화된다면, 독일에서 그것은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끔찍한 현실로서 악마화된다. 이렇듯 전체주의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엇갈린 운명을 겪는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판이하게 달랐다는 통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념은 이탈리아 파시즘이 1938년의 인종법을 통해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2차대전 당시 슬로베니아 인들을 학살한 사실들을 은연중에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 나치즘에 비해 이탈리아 파시즘의 악행이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덜했다는 것은 문제의 요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체주의 자체에 홀로코스트의 경향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따라서 이 점에 주목하면, 전체주의는 단순한 ‘맥거핀’ 이상의 공포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냉전 시대에 등장한 ‘전체주의론’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전체주의는 국가의 폭력과 테러를 양산한 끔찍한 반인륜적 독재 체제이다. 이 시각은 전체주의 체제가 자행한 악행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그러한 악행을 낳은 이념적 논리와 사회경제적 맥락을 무시하고 단지 통치의 형태학에만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비판자들은 ‘전체주의론’이 도저히 한데 묶을 수 없는 파시즘/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동일시하고 궁극적으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합리화함으로써 냉전 체제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론’이 갖는 더 큰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전체주의를 단순히 국가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공포의 체제로 보는 것은 그러한 공포를 강제해야 할 정도로 사회는 전체주의에 반항적이었다는 생각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 가령 이탈리아의 경우에서 그러한 생각은 곧 파시스트적인 국가와 비(반)파시스트적인 사회, 혹은 더 널리 사용되는 표현을 빌리자면, “법률상의 이탈리아(legal Italy)”와 “사실상의 이탈리아(real Italy)”의 이항대립으로 이어진다. 이는 파시즘을 지지한 나라와 그 나라의 대중들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여겨진다. 실제의 이탈리아는 지성과 도덕으로 충만한 나라이지만 불행히도 파시즘이라는 더러운 “하수구”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소수의 패륜적 지도자들과 다수의 선량한 민중이라는 예의 이분법이 작동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탈리아 인들이 “하수구”에 빠지게 되었고,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수구”에 머물렀는지에 대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문제는 20세기의 그 어떤 이탈리아 정부도 도달하지 못했던 파시스트 정부의 내구성, 그러니까 파시즘의 20년간의 집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을 단순히 국가 폭력 체제임을 넘어 사회 주요 부분의 지지와 협조 아래에서 일관된 이념적 목표에 따라 조직된 정치 운동/체제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파시즘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대중적인 동의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거꾸로 왜 그동안 연구자들이 파시즘을 하나의 이념으로 보기를 거부했는지를 설명해준다. 확실히 나름의 목표와 강령을 지닌 이념은 시민 사회 속에서 확산되며, 따라서 일정한 동의를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연구자들로서는 파시즘에 대해 이를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국가와 폭력이 파시즘의 키워드가 되면서 시민 사회와 동의의 차원은 파시즘 연구에서 누락되고 말았다. 물론 동의의 정도와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국가의 이념적 목표와 대중들의 욕망이 얼마만큼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가 단순히 전제 정치(despotism)로의 퇴행이 아니라 대중 정치와 대중 사회의 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특정한 이념, 그러니까 사회의 진보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보는 특수한 시각이라는 점이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파시즘의 전체주의를 보는 두 가지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전체주의를 단순히 기만의 수사나 폭력의 기술로 보는 것은 그것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전체주의를 희화화하거나 악마화하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이해함으로써 그것의 부활을 방지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전체주의를 그 자체로 진지한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전체주의를 우리 사회의 논리로부터 도출되는, 그리고 우리 자신이 연루되어 있는 하나의 이념 ― 때로는 고상한 이론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난폭한 여론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는 ― 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파시스트들이 생각하고 말한 바를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장문석 서양사, 한양대 연구 교수>

(프로메테우스 2005-12-15)

[칼럼]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기③

파시즘은 왜 억압적이었는가?

우문에는 현답이 있을 수 없다. 현답을 원한다면 현문을 제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억압적인 이유를 묻는 질문은 우문인가, 현문인가? 일단 파시즘이 최악의 억압 체제임이 자명해 보이므로 이 질문이 생뚱맞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질문이 새삼스럽다고 느끼는 것에는 파시즘에 대한 어떤 선험적인 판단이 깔려있다. 즉 파시즘은 도저히 우리의 상식적 논리로는 파악될 수 없는 비합리적일뿐더러 광신적이기까지 한 정치적 이상기형물이라는 판단이다. 그러므로 생뚱맞음을 무릅쓰고 파시즘이 억압적인 이유를 묻는 것은 파시즘의 폭력이 어떤 상식적 논리의 귀결은 아닌지 의심하기 위함이다.

과연 많은 논자들이 파시즘이 1차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1차대전이 없었어도 파시즘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자못 의문스럽다. 특히 1차대전 직후에 이탈리아에서 조성된 특이한 사회적 소요 상태, 그러니까 이탈리아 사에서 이른바 ‘붉은 2년’으로 알려진 정국은 파시즘이 배양된 인큐베이터였음에 틀림없다. 그런 사회적 혼돈과 무질서에서 ‘볼셰비즘으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라는 파시스트들의 구호가 잘 먹혀들었으니 말이다.

기실, 파시스트들의 ‘법과 질서’의 담론은 비단 파시스트들만 아니라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었다. 가령 당대 사회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붉은 2년’에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과 공장 점거를 감행하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그들이 “국가 속의 국가들”을 구축하고 중앙 권력을 분쇄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런가하면 당시 이탈리아 최대의 자동차 회사 피아트(Fiat)의 한 엔지니어는 미국 산업계를 시찰하고 난 직후에 이탈리아가 미국을 열심히 따라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남으로써 경제적 퇴보가 야기되고 있다고 탄식했다. “우리는 적게 노동하는 것으로 따지면 이탈리아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임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담론들은 전후에야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대전 초기에 보수적 자유주의자 마페오 판탈레오니는 “살인범이 처벌되고, 폭력범은 체포되며, 절도범은 추적당하고, 파렴치범은 재판에 회부되며, 경제사범은 색출되어 근절되고, 방화범은 붙잡히는 것, 간단히 말해, 일체의 사적 폭력에 맞서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 그것도 오직 ‘국가 폭력’에 의해서만 도움을 받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법률들에 의해 생명과 재산이 보호”받을 수 있는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처럼 분명한 어조로 ‘법과 질서’, 그리고 그것의 담보로서 국가의 공적 폭력을 요구한 예는 달리 없다. 여기서 판탈레오니가 이탈리아 국가의 희박한 공공성과 그에 따른 취약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당연하게도, 강한 국가에의 염원은 20세기 초입의 민족주의 담론들과 궁합이 잘 맞았다. 많은 논자들이 19세기의 국가 통일에도 불구하고 국민 통합이 부재한 상황, 그러니까 단순화시켜 “국민 없는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 이탈리아 특유의 한계 상황을 투철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한계가 치열한 제국주의 각축전에서 이탈리아를 뒤처지게 하는 요인임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자 엔리코 코라디니는 세계를 “부르주아 국민”과 “프롤레타리아 국민”으로 나누고 “프롤레타리아 국민”으로서의 이탈리아가 국제적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내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단일한 생산자로 통합되는 민주주의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맥락에서 수많은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이 ‘국민적’ 생디칼리스트들로 변신한 사실이 잘 이해된다. 이런 민족주의 담론에서 특이한 것은 기성의 마르크스주의의 문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지 어휘만을 ‘계급’에서 ‘국민’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혁명가 무솔리니가 파시즘의 지도자로 변신한 과정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생디칼리스트들과 무솔리니의 그런 변신 과정에는 한 가지 중요한 논리가 숨어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부국강병의 논리이다. 엄혹한 국제 경쟁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요구 앞에서 숱한 ‘좌파’가 민족주의로 투항했다. 이처럼 “발전”의 논리와 “조국”의 담론을 명시적으로 연결시키는 이념은 이미 통일 직후부터 나타났다. 가령 1870년대에 레오네 카르피는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공업강국이자 해운강국으로서의 이탈리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이 말에서 “공업강국이자 해운강국”이라는 표현보다는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비슷한 시기에 19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기업가 알레산드로 로시가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의 입장에서 보호주의로 급선회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징후적으로 읽힌다. 이런 사실들을 중시하면서 역사가 실비오 라나로는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의 전략적 담론이 “민족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경향적으로 전체주의적인” 특징을 보이면서 전개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의 담론적 기원은 1차대전이라기보다는 19세기 국가 통일이라는 넓은 역사적 · 구조적 맥락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기획은 명백히 ‘근대성’이라는 매트릭스 위에서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근대성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때의 근대성이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을 완성하려는 근대적 충동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사회 구성의 전제로서 국민국가를 완성하려는 근대적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을 이탈리아 특유의 ‘절름발이’ 자본주의의 봉건적 잔재로 보거나, 아니면 전근대 국가의 야만적 분비물로 보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요컨대 전체주의는 중세로의 역진이 아니라 근대로의 전진인 것이다.

물론 ‘근대적’ 파시즘에 전근대적으로, 심지어 반근대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요소들이 아니라 요소들의 배치이다. 가령 파시즘이 미국식 대량 생산보다 수공업적 장인 생산을 이상화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위한 또다른 경로로서 파악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파시즘이 아무리 “농촌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을 숭배했다고 한들, 그것은 파시즘의 전(반)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전통’은 오직 그것이 쓸모없게 된 ‘근대적’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 살면서 ‘전통’을 애써 강조할 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파시즘의 전체주의적인 근대성의 기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방해하는 장벽, 예컨대 사회주의 문화에 침잠된 노동계급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전체주의적인 의미에서 계급을 국민으로 바꾸어내는, 이른바 “노동대중의 국민화”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시즘은 계급 이외에도 종교, 젠더, 지역, 세대 등의 다양한 정체성들을 단일한 국민 정체성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국민화”가 다양한 정체성들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한, 달리 말해 완강하게 정체성의 독점을 추구하는 한에서 다른 정체성들의 파괴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여기서 폭력으로 이끌리는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경향이 잘 설명된다. 요컨대 파시즘의 폭력은 근대 사회의 다원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인식으로부터 유래했다. 인식의 폭력이 실천의 폭력에 선행한 것이다. 과연 ‘붉은 2년’ 막바지부터 잇따른 좌익 노동자들에 대한 파시스트 행동대의 잔인한 테러와 린치는 바로 그런 파시즘의 폭력성이 요란하게 분출된 장면이다. 그리고 폭력이 유난히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은 파시즘이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지를 반증한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은 무엇보다 사회주의와 계급 사회에 대해 ‘전체주의적’이었다.

그러나 1922년 10월의 ‘로마 진군’으로 집권한 이후 파시즘은 물리적 폭력보다는 법률적 강제에 점점 더 많이 의존했다. 파시스트 정부는 1925-6년에 지하 조직을 단속하는 결사법과 파업을 금지하는 노동관계규율법을 비롯한 무수한 법률들을 쏟아냈다. 특히 1927년 1월 5일에 나온, 지사의 권한 강화를 명시한 유명한 회람장에서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행동대의 ‘비합법주의’에 전쟁을 선포한 것은 파시즘의 그런 ‘합법주의’의 정점이었다. 확실히, 이 국면은 많은 연구들에서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법적 조치들이 억압적 현실의 눈가림용이었을 뿐이라고 간단히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시즘의 ‘합법주의’가 앞에서 살펴본 ‘법과 질서’, 혹은 ‘공공성’의 담론에 부합하는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이 파시즘의 폭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법적 조치들을 통한 ‘폭력의 공공화’, 혹은 ‘비합법성의 합법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공화’와 ‘합법화’에 주목함으로써 파시즘이 특정한 계급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들 속에서 지지자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파시즘을 특정한 사회 계급의 대행자 ― “대자본의 대행자”나 “중간계급의 대변자” ― 로 보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파시즘 연구들은 줄기차게 그 계급 기반을 질문해왔다. 하지만 다양하게 제시된 답변들은 파시즘이 ‘모든’ 계급들로부터 지지자들을 충원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무장해제 당했다. 그렇다면 ‘계급’이 아니라 ‘계급 관계’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질문을 바꿔 파시즘이 이탈리아의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서 제기된, 단순히 계급적 요구로 치환될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요구, 그러니까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효율적 발전을 저해하는 특정한 계급 관계의 재편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좀더 설득력 있는 답변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파시즘의 시도는 노동자들을 흡사 살아있는 기계처럼 노동 과정에 포섭하는 새로운 국민적 생산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부르주아’의 이기심과 근시안까지도 교정하려는 총체적인(그러므로 전체주의적인!)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보면, 파시즘의 전체주의 담론 속에 생산주의 ― 미국주의와 포드주의를 설명할 때 안토니오 그람시조차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생산주의! ― 가 민족주의에 그렇게도 단단히 결부되어 있는 이유를 쉬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전체주의적 경향의 민족주의에 포박된 생산주의야말로 근대성을 달성하는 파시즘의 방법이었다.

이제 결론을 내릴 겸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파시즘은 왜 억압적이었는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중간 논변들을 잘라내고 앞뒤만 연결하면 이렇다. 파시즘은 근대성의 요구에 충실히, 너무도 충실히 응하려 했기 때문에 억압적일 수밖에 없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파시즘은 그 강렬한 근대적 충동으로 말미암아 계급 등등으로 분열된 사회적 현실에서 발원하는 사회적 갈등을 (‘중재’하기보다는) ‘초월’하려고 함으로써 억압적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가 파시즘의 핵심적 특징으로 거론하는 ‘초월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관념성’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근대성의 평범한 어휘들, 즉 “조국”과 “발전”에 대한 관념적 이해 ― 현실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는 ― 에서 탄생했다고 하겠다. 파시즘이야말로 상식적 논리가 특정한 조건에서 최악의 이상기형물을 낳을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인 것이다.

그러나 내밀한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당시에 귀에 익은 근대성의 어휘들은 이탈리아 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파시즘이 그 어휘들을 전유했던 한에서 그에 대한 대중의 ‘동의’도 있었을 법하다. 만일 ‘동의’가 있었다면,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는 필경 “조국”과 “발전”이라는 기표들의 지시 대상으로서의 국가 폭력과 노동 통제의 요구에 대한 ‘동의’인 것이다. 그런데 파시즘은 정말이지 대중의 ‘동의’를 얻었는가? 이것이 다음에 살펴볼 주제이다.

<장문석 서양사, 한양대 연구 교수>

(프로메테우스 2006-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