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몸을 지배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느끼는 통증은 두 단계라고 한다. 실제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감각과 이 감각에 대한 각자의 지각적 판단. 신체 감각이야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감각에 따른 지각적 판단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심리적 고통은 물론이고 육체적 통증까지 대개는 대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문제라는 해석이다. 지난 몇 주간 일요일 저녁마다 KBS TV의 6부작 다큐멘터리 ‘마음’을 봤다. 마음이 몸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분석한 사례들을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 줬다. 그중 인상적인 게 수중 분만하는 산모였다. 르누아르 그림 속 여인같이 뽀얗고 고운 산모는 찡그리지 않고, 평화와 신성에 가득 차서 ‘오 마이 갓!’을 외치며 방금 제 몸에서 빠져나온 생명을 받아 안았다. 그건 마취도 최면도 종교도 아니었다. 출산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을 제 마음이 충분히 납득한 결과였을 뿐이다.

여성의 몸은 뱃속에서 아기를 길러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밀어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자연스러운 설계에는 원래 통증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통증을 만든 건 문명이고 마음이었다는 걸 그 장면은 보여 줬다. “작은 질구를 통해 아기의 커다란 머리가 빠져나오니 아플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피가 그렇게 흐르는데 통증이 없을 리가!”라고 생각한 건 피를 보고 겁에 질린, 상식적 사고에 익숙한 남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반복되면서 더욱 커졌다. 여자들의 공포감도 증폭되었다. 공포 때문에 불안에 빠진 산모는 호흡과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도 긴장된다. 긴장은 산도(産道)를 경직하게 만들고 경직된 근육을 뚫고 나오려는 아기와 산모는 둘 다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이완된 상태의 다큐멘터리 속 산모는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겼지만 통증을 견뎌 낸 탁한 눈물이 아니었다. 감격과 환희가 뿜어 올린 맑은 눈물이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걸 보며 내 눈에도 비슷한 게 고여 왔다.

20년 전 나도 아기를 낳았다. 봄이 막 시작되는 이맘때였는데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엄마 자격을 얻으려면 그만한 고통쯤은 당연히 견뎌야 하는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을 떨치고 긴장을 풀면 해산은 자연일 뿐이라고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저렇게 평화롭고 충만한 출산이 있다니! 놀라움과 감격과 호기심에 분한 마음까지 겹쳐 나는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기본 자료를 제공했다는 심리학자를 만났다. 그가 이끄는 명상 그룹에도 참여했다. 건포도 한 알을 들고 20분을 고요히 제 감각이 이끄는 대로 마음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명상이었다. 어렵지 않았다. 불교의 간화선처럼 지루한 화두를 붙들고 앉을 필요도 없었다. 지금(今) 여기(處)서 파도처럼 움직이는 제 마음(心), 그 염처(念處)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깨어 있으려는 노력만 하면, 아령 운동으로 팔뚝에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생기듯 마음에도 근육이 생긴다는 거였다.

그 근력은 이를테면 집중력 이해력 창조력 기억력 포용력 인내력이 되고 실제 임상에서는 통증 감소, 혈압 저하, 혈당 강하, 혈류 조절, 스트레스 해소, 면역력 증강, 우울증 해소 같은 반응을 가져온다. 그게 여러 차례 수치로 증명됐다고 한다. 이 연구에 앞장서 모든 질병의 80%가 마음에서 온다고 발표한 건 미 하버드대 의대의 허버트 벤슨 교수였다. 그 말을 뒤집으면 약이나 수술 없이 마음만으로 질병의 80%를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벤슨 교수는 지금 서양의학을 위기에서 구한 성웅 대접을 받고 있다.

명상은 원래 우리 것이었건만! 미국 내 종합병원 중 심신의학과가 개설된 곳은 지금 80군데가 넘는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저 멋진 출산도 미국의 경우였다. 우리 병원에도 얼른 심신의학과가 생기길 바란다(올해 처음 가톨릭대병원이 도입할 예정이다). 비용도 들지 않고 부작용도 없는 심리치료 효과를 지금 병상에 누운 환자들이 당장 느껴볼 수 있기를! 거기서 절약되는 의료비는 또 얼마인가.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마음으로 제 몸 안의 병인을 깨끗이 밀어낼 수 있다. 그건 이미 실증적 과학이다. 그때 낳은 스무 살 내 딸이 출산할 즈음엔 누구나 르누아르풍 산모 같은 경험을 하기를! 아니 현재 임신 중인 분이라면 당장 시도해 보시기를!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동아일보 200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