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 피란민 구조 공로 ‘로버트 러니’씨 대휘장 받아

“한국의 젊은 세대는 전쟁의 참화를 딛고 경제기적을 이룬 부모 세대의 희생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23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로부터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란민을 구조한 공로로 대휘장을 받은 로버트 러니(79) 씨는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고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한 모든 사람을 대신해 대휘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러니 씨는 “오늘날 한국의 자유와 풍요는 거저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해 피란민을 구조한 미국 상선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이었다. 그는 “혹한 속에 중공군의 대공세를 피해 부두로 몰려든 수많은 피란민의 공포에 질린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당시 흥남항은 3∼4km 떨어진 곳까지 중공군의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데다 부두와 백사장에는 부녀자와 어린이 등 수많은 피란민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유엔군은 당초 군 병력과 장비만 철수시키려다 한국군의 강력한 요청으로 197척의 선박과 1만7500여 대의 차량을 동원해 10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의 구조 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인근 해역에서 미군 지원 임무를 맡고 있던 빅토리호의 선원 47명도 1950년 12월 22일 정원의 7배가 넘는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사흘 만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해상엔 곳곳에 기뢰가 떠다니고 배엔 식량과 마실 물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빅토리 호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구조한 것. 이 같은 기록으로 빅토리호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러니 씨는 “공포와 위기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은 한국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다”며 “공산치하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나선 피란민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지난해 맥아더 장군의 동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그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맥아더 장군은 공산군에 맞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라며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올해 네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러니 씨는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며 “2001년 세상을 뜬 레너드 라루 선장을 비롯해 생존 중인 다른 동료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법무부 연방검사를 거쳐 현재 뉴욕 주 변호사로 활동 중인 러니 씨는 24일 우석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다음 달 2일 이한한다.

메리디스 빅토리호 :

7600t 급 미국 상선으로 6·25전쟁 당시 흥남항 인근 해역에서 미군 항공기에 제트유를 공급하는 임무를 하다 흥남철수작전에 참가했다. 1990년대 초까지 화물선으로 운항하다 중국에 폐선으로 넘겨져 분해됐다. 수년 전 미국에서 빅토리 호의 영웅적 구조담을 다룬 ‘마리너스 기적의 배’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 윤상호 기자 2006-2-24) 

[분수대] 흥남 철수

"그 추위 속에 피란민들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누군가가 태워 주기를 바라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미 10군단장 보좌관 헤이그(나중에 미 국무장관 역임) 대위의 기억이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은 피란민 후송에 난색을 표했다가 정찰기를 타고 흥남부두 현장을 돌아보고야 마음을 바꾸었다. "저들을 놔두고 그냥 갈 수는 없다." 1950년 12월 중순 흥남 철수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달 20일 맥아더 사령부 지시로 7600t급 미국 화물선 빅토리호가 흥남부두에 접근했다. 선착장과 백사장은 피란민들로 넘쳐나고, 그 옆에 놀란 병아리처럼 몰려든 아이들…. 레너드 라루 선장의 쌍안경에 들어온 모습이다. 미군 참모가 "얼마나 태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자 그는 두말하지 않고 지시했다. "많이, 되도록 많이 승선시켜라. 배가 가라앉지 않을 만큼." 무려 1만4000명을 태운 이 배는 기뢰를 뚫고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후 54년간 빅토리호는 기억에 묻혔다. 93년 중국에서 폐(廢)화물선으로 분해돼 운명을 마쳤다. 2년 전에야 빅토리호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조한 배'로 등재됐고, '기적의 배'라는 이름을 얻었다. "가끔 그 항해를 생각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태웠고, 어떻게 그 위험한 항해를 마쳤는지 신비롭다." 나중에 수도사가 된 라루 선장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빅토리호 선원이던 로버트 러니(79)가 24일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우석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 56년 만의 보은(報恩)이다. 뉴욕 변호사인 그의 집에는 항상 태극기가 걸려 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그들은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피란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다." 러니는 "더 큰 감명을 준 그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공원 한쪽에는 흥남 철수 기념비가 서 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빅토리호는 그 기념비 받침대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CNN과 외국 통신사는 다 몰려왔는데, 국내 언론은 토막 뉴스로 처리했어요." 공원 행정담당 김민수씨는 지난해 제막식을 떠올리며 서운한 표정이다. 미안하고 부끄럽다. 늦게라도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러본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앞날이 없다고 했다.

<이철호 논설위원>

(중앙일보 2006-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