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기병

열린당 정동영 의장은 시체 기름을 짜내 만든 인유포를 아는가

몽골기병은 잔인했다. 점령지역의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가차없이 학살했다. 그 시체에서 기름을 짜냈다. 성을 공격할 때 이 기름에 불을 붙여 화포를 발사했다. 이를 '인유포(人油砲)'라고 했다. '사람기름 대포'였다. 소름끼치는 살벌한 무기였다.

몽골기병은 세계를 점령하면서 가는 곳마다 6가지 '항복조건'을 강요했다. 이른바 '몽골 6사(六事)'다. ①인질을 바칠 것 ②군사를 내서 몽골을 도울 것 ③식량을 제공하고, 운반할 것 ④역참을 설치하고, 교통편의를 제공할 것 ⑤호구를 조사해 보고할 것 ⑥총독인 다루가치를 둘 것 등이었다. 몽골의 '6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글자 그대로 '싹쓸이'를 당했다. 폐허가 되어야 했다.

몽골기병은 기동력이 대단했다. 마르코 폴로라는 서양사람은 몽골기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도 적을 물리친다. 후퇴를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며, 후퇴할 때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다. 말을 타고 적의 주위를 돌면서 끊임없이 화살을 퍼붓는다. 뒤따라오는 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적과 대치하는 듯하다가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며 분산해서 공격하는 몽골기병의 전투방식이 희한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이 뛰어난 기동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몽골은 기동력과 '인유포'로 세계를 점령했다고 해도 심한 말은 아닐 것이다.

몽골은 고려를 침략할 때도 예외 없이 '인유포'를 사용하고, 기동력을 발휘했다. 빨리 항복하라며 '6사'도 요구했다. 여기에 맞선 고려의 대응책은 전통적인 '청야수성(淸野守城)'이었다. 적이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식량과 물자 등을 깡그리 짊어지고 성에 들어가서 농성하는 전술이었다. 적은 성을 포위하고도 밖에서 굶주려야 했다.

고구려 때에는 이 전술로 적을 멋지게 격퇴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장수는 손자병법을 처음부터는 물론, 거꾸로도 줄줄 외울 정도로 병법에 정통했다. 하지만 손자병법은 '청야수성전술'을 당할 수 없었다. 성에서 농성을 하다가, 허점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기습하는 고구려의 게릴라 작전에 말려들고 말았다.

고구려를 이은 고려 역시 몽골과 싸울 때 '청야수성전술'을 구사했다. 유명한 귀주성 싸움에서 김경손(金慶孫) 장군은 날아온 화살이 팔뚝에 꼽혔다. 그래도 쥐고 있던 북채를 놓치지 않고 북을 울렸다. 몽골군이 발사한 포석(砲石)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 뒤에 있던 병사를 산산조각내기도 했다. 부하들이 안전한 장소로 옮겨서 지휘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경손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몽골군의 어떤 노장은 이런 고려군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다. 하지만 이처럼 심한 공격을 받고도 항복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성안에 있는 고려 군사들은 나중에 반드시 장수나 정승이 될 것이다."

고려는 몽골과 30년이나 싸웠다. 몽골이 '6사'를 요구하면 오히려 강화조건을 내놓았다. 그 조건이 당당했다. 고려의 풍속을 바꾸려하지 말 것, 개경 환도를 재촉하지 말 것, 몽골군을 철수시킬 것, 다루가치를 고려에 두지 말 것 등이었다. 천하무적인 몽골도 고려의 청야수성전술을 만만하게 여기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방선거를 100일 앞두고 여야가 '전면전'에 돌입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몽골기병을 내세워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몽골기병작전'을 여전히 밀어붙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몽골기병의 기동력을 발휘해 속전속결로 '한판승'을 거두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지지율이 앞서는 한나라당의 '청야수성'을 돌파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몽골기병은 악명 높았던 '인유포'를 연상시킨다. 어쩐지 살벌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늙은이와 어린아이를 '인유포' 기름으로 사용했던 몽골기병이다. 몽골기병에게 노인과 아이들은 용도가 '사람기름'에 불과한 '소모품'이었다. 정 의장은 노인 폄하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김영인 논설위원> 

(데일리안 2006-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