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대륙 ‘제2문화혁명’ 목청 커진다

올해로 중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인 문화대혁명(1966~76년)이 일어난 지 40년, 끝난 지 30년을 맞았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주도한 문화혁명으로 중국은 10년 동안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공장 가동이 중단되는 ‘암흑기’를 맞았다. 그러나 문화혁명에 앞장섰던 ‘4인방’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이 28년을 맞은 지금, 계층간 지역간 양극화가 심각해지면서 문혁에 대한 시각은 한층 다양해지고 있다. 문혁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반면 ‘제2의 문혁’을 기대하는 요구도 적지않게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6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짤막한 부음 기사를 내보냈다. 바로 문혁을 주도한 ‘4인방’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였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74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부인이기도 한 장칭(江靑)의 지시로 1965년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이다.

짤막한 그의 부음 기사는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적지않은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화통신은 야오원위안을 ‘린뱌오(林彪)·장칭 반혁명집단 수괴’라고 밝히고 있다. 문혁기간 중 마오쩌둥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71년 9월13일 몽골에서 추락해 숨진 린뱌오에 대해 현 공산당 지도부가 복권을 추진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부음 기사에서는 ‘4인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이는 4인방의 배후 조종자가 마오쩌둥임을 연상시키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의 국부인 만큼 그가 문혁을 주도해 온나라를 파탄에 빠지게 한 것을 인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싶어한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 문혁에 대한 엇갈린 평가 =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문혁이 끝난 지 5년 뒤인 81년 6월 ‘건국 이후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문혁을 10년 동란이라고 규정한 것이 아직은 유일한 문혁에 대한 당의 공식적인 평가다. 결의문은 마오쩌둥의 잘못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며 문혁을 완전 부정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문혁 재평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직 고위 당간부들이나 개혁지향의 진보성향 학자들이 앞장을 서고 있다. 90년대 초 덩샤오핑의 개혁을 지지하는 칼럼을 ‘황푸핑(黃甫平)’이라는 필명으로 상하이 해방일보 등에 자주 기고했던 저우루이진(周瑞金) 전 인민일보 부총편집은 문혁 재평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저우 전 부총편집은 경제 전문지인 ‘재경(財經)’ 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야오원위안의 죽음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이제는 문혁에 대한 재평가를 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덩샤오핑(鄧小平)도 81년 당의 결의문 채택 당시 “지금 결론을 내리는 것은 국내외의 시선을 의식한 부득이한 조치”라며 “앞으로 20년이나 30년이 지난 뒤 재평가를 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비서를 지낸 리루이(李銳) 전 공산당 조직부 부부장은 “문혁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정치체제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덩샤오핑도 개혁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정치체제 개혁이 성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리루이 전 부부장이 정치체제 개혁으로 내세우는 것은 당총서기를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등 당 최고지도부의 경선과 당정 분리 등 당내 민주화를 가리킨다. 당내 민주화를 비롯한 정치체제 개혁을 서둘러 단행하지 않으면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격언대로 중국 공산당이 내부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경고를 곁들이고 있다.

중국의 전기작가인 예융례(葉永烈)는 “젊은이들이 문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야오의 죽음으로 4인방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4인방의 역사는 지울 수 없다”며 재평가를 요구했다. 한 네티즌은 “말로는 역사를 잊지 말자고 하면서 정작 문혁이나 대약진운동,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단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며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혁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앞으로도 ‘제2의 문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신좌파 소장 지식인들도 적지않게 눈에 띈다. 이들은 당의 공식 입장을 감안해 노골적으로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한 네티즌은 저우루이진 전 부총편집이 지난 8일 광명일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개혁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기고문에 대한 댓글에서 “중국은 문혁 10년 동안 여러 기적을 이뤘다”며 “마오 주석은 문혁 기간 중 중국 역사상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문무를 겸비해 결국은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야오원위안에 대해 추모를 하면서 그를 서둘러 복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에 대한 무지이며 건망증이라는 시각도 있는 반면에 심각한 양극화를 빚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못살아도 다같이 못사는’ 문혁 당시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 여전한 문혁자료 통제 = 중국 당국은 아직도 문혁 자료에 대해 통제를 하고 있다. 국가 문서보관소는 물론이고 대학 도서관 등에서 문혁에 대한 자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야오원위안이 15세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는 일기나 40만자 분량의 자서전도 문혁과 관련해 소중한 자료이지만 당국이 압수해간 상태다. 미국 필라델피아 디킨슨대학의 중국인 쑹융이(宋永毅) 교수가 99년 문혁 자료 수집차 중국에 들렀다가 국가기밀문서를 해외로 반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가 2000년 풀려났을 정도로 중국은 문혁 자료 공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터넷으로 문혁 도서관을 운영하던 사이트 연남망(燕南網:www.yannan.cn)은 지난해 9월부터 당국의 조치로 문을 닫았다. 블로그도 내용이나 사진에 문제가 있는 부문이 있으면 여지없이 삭제되고 있다.

문혁 재평가가 언제쯤 단행될 것인가. 중국 지도부는 재평가 요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건설에 치중해야 하는 만큼 가능한 한 정치적 논쟁을 피하려 들 것인 만큼 낙관론과 신중론이 엇갈리고 있다. 오는 5월16일, 문혁 발발 40주년에 즈음해 당의 방침이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 / 홍인표 특파원 2006-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