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스크린쿼터

일년 중 한국 영화 의무 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줄인다는 정부 방침에 영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배우와 감독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연일 시위를 하고, 항의 표시로 문화훈장까지 반납한 배우도 있다. 시민단체들도 가세해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영화인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투쟁에 나섰지만 ‘집단 이기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화계 입장만 생각해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요구를 거부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불리하게 돼 다른 산업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한국 영화가 관객 1000만 시대를 맞은 만큼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이 없어도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겨룰 수 있는 수준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영화를 한·미 FTA의 희생양으로 삼을 일은 아니다. 영화 같은 문화 상품은 일반 상품과 다르다.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미국의 대형 영화사들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한국 영화시장 점유율을 높이려 할 것이다. 이번에는 50% 축소였지만 다음 번에는 100% 축소 즉 완전 폐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스크린쿼터는 제작이 아닌 유통의 문제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도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장은 한국 영화 제작에 영향을 주지 않을지라도 쿼터 축소에 따른 심리적 위축은 투자와 제작 편수 감소, 한국 영화의 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욱 어이없는 일은 우리나라에 문화부 장관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정동채 문화부 장관은 지난해 “스크린쿼터 문제는 영화인들과의 협의를 통해 조정해나가겠다” “스크린쿼터를 FTA와 연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영화인들이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문화부 장관이라면 방패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참여정부 출범을 전후해 의식 있는 영화인으로 알려졌던 몇몇 배우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몇몇 영화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해서 한국 영화 전체가 충분한 경쟁력을 지닌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영화는 문화주권의 문제다. 미국이 할리우드와 비교가 안 되는 한국 영화시장 개방에 집착하는 이유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스크린쿼터 축소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국민일보 / 김수완 논설위원 2006-2-9)

[칼럼] 문화는 단순한 소비재 상품 아니다

문화는 단순한 소비재 상품 아니다

요즘 광화문이 대낮에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우리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조건으로 극장에서 국산영화를 연간 의무적으로 상영하게 돼 있는 스크린쿼터의 날짜를 1백46일에서 절반으로 줄이기로 한 정부의 결정에 영화인들이 벌이는 반대시위 때문이다. 한 사람이 벌이는 1인 시위지만 시위의 주인공이 워낙 유명한 인기 영화배우들이라 스타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6일에는 장동건이 1000명에 가까운 팬들이 갑자기 에워싸는 바람에 이들을 피해 시위장소를 옮겨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7일에는 1인 시위에 나선 최민식이 한국 영화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크린쿼터를 꼭 지키겠다던 문광부가 하루아침에 말을 바꾼데 항의해서 문화주권을 포기한 정부의 훈장을 더 이상 간직하고 싶지 않다면서 <옥관문화훈장>을 문광부에 반납했다.

문화 다양성협약 무기로 활용을

인터넷에서도 스크린쿼터 폐지를 놓고 찬반 공방이 뜨겁다. 스크린쿼터의 축소 존폐에 대한 논쟁은 주로 영화산업의 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 공방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가 상품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가치는 돈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문화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는 인상이다. 그것은 마치 신문이 상품이지만 단순한 소비 상품이 아닌 것과 같다.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레닌처럼 신문과 영화의 위력을 높이 평가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신문과 영화가 지니고 있는 설득 능력 이데올로기 기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영화의 이데올로기 기능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를 끈덕지게 요구해 온 데는 단순히 할리우드의 장사 속만을 대변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한국영화가 한 편에 1000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할 수 있게 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탓인지 스크린쿼터제를 처음 도입했을 때 강하게 제기됐던 영화문화론의 목소리가 논쟁에서 별로 들리지 않는다. 당시 스크린쿼터를 역설하던 사람들은 영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문화적 창작물이니만큼 다른 상품처럼 무역 협상대상에 포함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앞세웠었다. 작년 말 유네스코에서 채택된 <문화적 표현 다양성 보호 촉진 협약>은 문화 다양성은 ‘인류의 공동 유산’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존중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윤리적 명령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미국은 문화다양성 협약에 반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에 쉽게 호응하리라고 보지는 않지만 우리는 전 세계 절대 다수의 국가들이 지지한 문화다양성 협약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자기방어 무기로 활용해야 한다.

미국은 지금 세계화로 세계경제를 조종하는 한편 영화와 멀티미디어로 세계인의 머리에 미국식 가치관을 심는데 이용하려한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학도 이러한 목적에 이용한다. 모두 미국식 자본주의를 ‘선교’하는 전도사들이다. 문화 다원주의와는 배치되는 행동이다. 세계 대다수 국가가 미국의 이같은 문화지배 정책을 경계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다년간의 노력 끝에 2001년 <문화 다양성에 관한 선언>을 채택할 때 1백85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선언문을 찬성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 2005년 10월 제33차 총회에서 이 선언을 토대로 <문화표현 다양성의 보호와 촉진에 관한 협약>을 채택할 때도 148개국이 찬성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반대국가는 둘뿐이었다. 이 협약은 30개국이 비준하면 3개월 후 발효되는데 올 1월20일 루마니아가 30번째로 비준해서 4월이면 정식으로 발효된다.

미국의 외국영화 점유율 1%

영화 분야를 보면 5개 정도의 국가가 세계 문화산업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다. 세계 185국 가운데 88개국이 자신의 영화를 제작해 본 일이 없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의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시장의 8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다른 나라에 대해서 영화 시장의 개방을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영화에 대한 자국의 영화 시장은 아주 폐쇄적이다. 미국 영화시장에서 외국 영화의 점유율은 1%도 안 된다. 할리우드는 미국인들이 미국 영화를 외국 영화 보다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영화 비평가 카이펜은 외국 영화의 미국 상륙을 어렵게 하고 있는 시장구조가 원인이라고 반박한다. 미국은 유네스코의 문화 다양성 협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영화는 ‘미국문화’를 소리 없이 침투시키는 매체로 이용하고 있다. 영화를 단순히 돈으로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다.

<장행훈 / 언론인 언론광장 공동대표>

(내일신문 2006-2-9) 

스크린 쿼터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수많은 언어와 종족, 그들의 문화가 사라졌다.

한 나라가 한 나라를, 한 종족이 또 하나의 종족을 멸절시키는 것은 총과 칼, 그리고 펜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데 총과 칼의 지배는 시간 아래서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다. 팔레스타인이나 이라크의 예를 굳이 들지 않고서라도 물리적인 힘만으로 사람과 종족, 그 문화를 지배하거나 없애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몇몇 열강들은 문화정책이라는 교묘한 방법을 통해 국가 간의 종속관계를 만든다. 선진과 후진이라는 이념을 만들고 다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각인시키고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를 주문한다.

이들의 요구는 하나에서 시작돼 결국 모두를 요구하기에 이르러서 끝을 맺는데 이는 먹물이 번지듯 서서히 이루어진다.

물론 문화적 변화가 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족이나 국가 간의 교류가 문화의 자생력을 기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나 다양성을 해치는 일방주의적 관점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요는 누구의 선택인가의 문제다. 맥도날드를 먹으며 할리우드 영화를 보든 한복을 입고 가야금을 듣든 그것은 단지 취향의 문제로 변화는 올바른 조건 아래서의 선택에 근거함이 옳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총칼과 펜 앞에 그야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의 문화는 타인의 선택에 의해 사라진 형국이다.

최근에 와서 스크린쿼터의 문제가 또 다시 뜨거워졌다. 혹자는 이만하면 빗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자생력의 무너짐과 문화적 종속을 걱정한다.

각기 근거를 말하고 예측되는 결과로 공방을 벌인다. 논의는 뜨거울수록 좋으나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강요되는 선택인지 혹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선택의 여지가 있으면 난상토론을 거쳐 올바른 선택을 하고 여지가 없으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칫 미필적 고의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예민한 지혜를 추구할 때다.

<이강욱 대안공간 반지하 갤러리 공동대표>

(대전일보 2006-2-9) 

[열린세상] 한·미 FTA와 정치의 죽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한다고 한다. 통상교섭본부장이 워싱턴 미의회 앞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협상 개시를 발표했다.

갑자기 머리가 뻐근해진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이 어떻게 한번도 제대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지 나로서는 그저 신기롭기만하다. 언론도 애써 공론화를 피하는 것 같고, 정치인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시민사회 단체는 갑자기 날아든 소식에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향후 한국의 산업, 문화, 심지어 방위정책과 통일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안이 정치의 손을 떠나 관료의 입으로 발표되었다. 정치는 명백히 죽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미 FTA는 무역과 투자를 넘어선 메가톤급 쓰나미가 될 것이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화 정책보다 더욱 큰 해일이 몰아닥칠 것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스크린 쿼터나 농산물 개방만이 문제가 아니다.

산업의 구조조정을 넘어서, 문화에 이르기까지, 남북경협과 안보정책에서 대중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영향권에 들어간다. 미국측이 이구동성으로 협상개시를 자축하는 것은 불안한 한·미동맹에 쐐기를 박는 효과가 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나도 FTA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수순이 틀렸고, 협상하는 방식이 졸속이다. 정말 조마조마한 느낌마저 든다. 일단 경제규모의 압도적 차이에서 오는 협상력의 비대칭성에서 출발해보자.

CIA의 2005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미국의 7% 수준에 불과하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멕시코의 GDP 규모가 8% 수준이다.

이런 수준이라면 미국에 한·미 FTA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이 겪어야 하는 것은 쓰나미 수준의 해일이다.

업계는 공산품 수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대미관세가 그다지 높지 않은 마당에 업계가 한·미 FTA를 목 놓아 기다리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신 농촌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문화산업은 송두리째 무너져버릴 것이다.

경쟁력이 허약한 서비스 산업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멕시코의 예를 보자면 금융업과 유통업은 너무 쉽게 미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교육, 의료, 법률 서비스 부문도 미국화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위로거리를 찾는다면 기러기 아빠들이 줄 것이고 과거보다 영어 발음이 조금 유창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업은 더욱 늘어나고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된다.

논란을 거듭한 한·미투자협정의 핵심내용도 고스란히 FTA에 옮겨지게 될 것이다. 미국인투자는 내국인 수준으로 보장되고, 노동의 유연화는 무역협정에 내장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사관계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되리라. 그래서 나는 한·미 FTA가 무역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미래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혁명적 수준이 되리라 예견한다.

혹시 공론화는 정책결정을 더디게 만드는 비용이라 생각해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일까. 한·미 FTA는 제2의 개국에 버금가는 사안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준비가 덜 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으로 IMF 사태를 맞았던 우리가 아닌가. 성장과 안정이 보장되는 한·미 FTA가 되기 위해서 시민사회, 학계, 언론은 향후 1년 내내 토론회와 공청회를 열어야 한다.

당연히 이 사안은 다음 대선후보들의 공약이 되어야 하고 협상도 차기정부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닌 것 같다.

<이성형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서울신문 2006-2-9)

[칼럼] ‘왕의 남자’와 제도화 덫

오랜 군사 정부에 이어 민간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의 지속적 관심사 중 하나는 민주화의 성과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론 특정 개인과 집단이 감정이나 분위기에 따라 정치를 좌우해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다른 한편으론 수많은 피땀과 눈물로 이룩한 민주화의 수레바퀴를 결코 거꾸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뜻에서다. 개별 리더십보다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말도 그런 취지다. 맞는 말이다.

생명력 거세된 궁궐속 마당극

그런데 영화 ‘왕의 남자’를 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제도화의 덫’이 엿보인다. 천민 출신으로 전국을 떠돌던 광대 공길과 장생이 짝을 이뤄 큰판을 벌이고자 한양에 갔고, 거기서 ‘왕’을 풍자하며 놀다 궁궐 안으로 불려갔다. 특히 공길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하고 자란 연산군의 공허한 마음을 잘 달랬다. 연산군의 눈에 공길은 때로는 엄마, 때로는 놀이 친구의 모습이었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를 ‘늘’ 곁에 두려고 ‘종4품’을 하사했다. 공길의 지위가 ‘제도화’된 것이다. 공길도 천한 종의 아들로 태어나 기생 손에 자랐기에 연산군과 감정이입이 쉬웠다.

이런 변화에 가장 괴로웠던 이는 단짝 광대 장생이었다. 연산군과 공길이 가까워지는 만큼 장생과 공길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적 멀어짐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신명나는 광대의 삶 자체가 생동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계급 경계선을 넘나드는 풍자와 해학 속에 모두 껄껄거리며 박장대소하는 모습, 외줄을 아슬아슬 타면서도 각본없이 손발을 척척 맞춰 진한 농을 주고 받는 모습, 그에 응수하는 관객들의 짜릿한 표정들…, 바로 이런 게 광대로 하여금 천민의 굴레를 뚫고 해방감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마당극은 야생성, 주체성, 예측불허성, 변화무쌍성이 생명력이다. 그러나 이게 궁궐 속으로 제도화될수록 그런 생명력이 떨어진다. 그만큼 생기를 잃는 것이다. “광대가 되어 어떤 놈과 짝 맞춰 노는 것에 눈이 먼” 장생이 진정 두려워한 것도 바로 이것. 그래서 “얼떨결에 궁궐에 들어와선 이렇게 눈이 멀어”버린 건 고문 끝에 시력을 잃은 장생만이 아니라 연산군이 던진 제도화의 덫에 갇힌 공길도 마찬가지. 이윽고 마지막엔 다시 줄 위에서 짝 맞춰 놀며 “새로 태어나도 광대로 태어날 것”이라고 함께 하늘을 뜀박질하지 않던가.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출발한 일들이 오늘날엔 기업 제도 속에 갇혀 경쟁력과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이 된 기형적 모습도 제도화의 덫이 아닌가. 자유 무역을 통해 세상 모두가 잘 살게 한답시고 만든 세계무역기구(WTO)나 자유무역협정(FTA)이 오히려 농민과 토착 문화를 압살하는 것도 같은 원리. 아이들을 자율적이고 협동적인 삶의 주체로 키우려고 교육제도를 만들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개성과 잠재력, 협동심을 말살하는 것, 또 자연과 응수하며 즐겨야 할 낚시가 양어장이라는 시스템 속에 ‘낚시 도박’으로 변질되는 것도 마찬가지. 1970년에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 인간 전태일 정신이 민주노조로 제도화되고 오늘날 노사정위원회로 제도화되면서 뭔가 생동감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풀뿌리 민주화 속에 그 해답

그러면 한편으로 민주화의 꽃을 조심스레 살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제도화의 덫을 피할 길은 없는가? 내가 보기에 그 답은 풀뿌리 민주화 속에 있다. 그것은 커다란 틀에서 보수반동화를 예방하는 제도를 갖추면서도 풀뿌리 민중이 그 내용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채우도록 자율의 공간을 활짝 펼치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 생동성에의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경향신문 2006-2-9) 

KBS 탤런트극회 스크린쿼터 지지 성명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과 관련 KBS탤런트극회(회장 임병기)가 9일 성명을 내고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극회는 성명에서 "한국영화는 스크린쿼터 제도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면서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의 붕괴와 한국문화의 도산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 홍성록 기자 20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