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 엄마가 행복해야 출산이 는다

무심코 문을 열었을 때 수곡 아지매는 애를 낳고 있었다. 발치에 짚이 깔려 있고 거기 피가 흥건했다. 아지매는 침착하게 가위로 탯줄을 자르고 대야에 미리 받아 놓은 물로 손바닥만 한 신생아를 씻겼다. 돕는 사람 없이 혼자였다. 나중에 그 아지매는 두고두고 말했다. “나는 누가 곁에 있으면 남사스러워 애를 못 낳는 성질 있데이. 자식 일곱을 낳아도 평생 내 해산하는 거 본 사람은 니밖에 없데이.” 그리 오래된 얘기도 아니다. 40년 전쯤 경상도 산골 마을의 풍경이다.

다시 10년쯤 후, 그곳 우체국엔 흰 비둘기 두 마리가 그려진 아래 ‘둘만 낳자’고 쓰인 우표밖에 없었다. 군인 간 친구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에 붙이기는 턱도 없는 구호였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둘만 낳자고 쓰인 우표를 사용했고 그 덕인지 그 친구와 결혼해 둘만 낳고 살게 됐다.

건강한 남녀가 함께 살면서 둘만 낳고 살기란 쉽지 않다. 억지로 아이 수를 둘에 맞추는 것일 뿐. 그 가장 큰 이유가 경제력이란 해석은 일견 옳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여자들이 애 낳기를 거부하는 것은 애를 낳아 키우는 게 도무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부모가 바친 투자의 10분의 1, 100분의 1도 돌려주지 못하는 게 자식임을 뻔히 알고 있으므로 나만은 그런 고비용 저효율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미리 다짐해 둔 것이다. 애를 하나 낳아 키우는 데 드는 어머니의 수고가 얼마나 되는지 여자 아이는 자라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본다. 모든 걸 양보하고 희생해도 당연하게 여길 뿐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다. 까딱하면 원망만 돌아온다. 이런 일이 대개는 평생 이어진다.

여성들이 자기 어머니의 일방적 수고를 살펴 주지 않는 세상에 단체로 반기를 든 것이 오늘의 저출산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식 없는(childless) 여성이 아니라, 아이로부터 자유로운(child-free) 여성이라고 불리기를 원하지만 그건 그들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꿈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내심 여자들은 자기 몸을 통해 애를 낳고 싶다는 꿈이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 본능을 막아 버렸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전 세대 어머니의 삶이, 엄마가 되고 싶은 딸들의 본능을 죽여 놓았다.

여성의 삶이란 철저히 가부장을 위해 봉사하는 게 행복이라고 세뇌했던 이데올로기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중이다. 여성들의 보복이다. 파업이 아니라 보복이다. 30년 전 ‘둘만 낳자’는 제발 둘보다 더 낳지는 말자는 뜻이었건만 현재 우리나라 가임여성 한 명이 낳는 자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1.16명이 돼 버렸다. 제발 ‘둘은 낳자’고 하소연하느라고 정부는 앞으로 20조 원을 쏟아 부을 거라 한다(2010년 목표치는 둘도 아닌 1.6명이다).

어제 만난 한 후배는 혼인은 하되 애는 낳지 않겠다고 남편과 미리 서약한 후 결혼할 거라 했다. 그러면서 명랑하게 덧붙인다. “그가 나중 생각이 바뀌어 애를 원하게 되면요? 그러면 애 낳기를 원하는 여자를 다시 만나라고 할 수밖에요.”

그는 물론 제 삶의 쾌적과 윤택을 위해 아이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한 번뿐인 것이 분명한 제 삶을 아이에게 ‘장악’당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이란 엄마의 삶을 장악하지 않는다고, 아이와 함께 살아야 삶의 지평이 넓어진다고 백번 말해 봤자 소용없다. 그가 지금까지 구경한 엄마들의 삶이란 아이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매인 경우뿐이기 때문이다. 그를 이기적이라고 꾸짖을 수 있을까. 인간은 각자 존엄하다. 당연히 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40년 전 어린 내 눈에 비친 수곡 아지매의 해산이 그토록 강렬했던 건 피 때문이 아니었다. 그 방에 넘치는 낯선 충만감 때문이었다. 어렸지만 나는 이미 알았다. 애를 낳은 여자는 비할 바 없는 행복에 휩싸인다는 것을. 제 배 속에서 애를 길러 낳고 싶은 본능을 억눌러야 하는 여자들이 실은 더 힘든 선택을 하고 있다. 여자가 행복해야 한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가 충만해야 한다. 그걸 보고 자라야 딸들이 애 낳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저출산 대책으로 편성된 정부 예산 20조 원은 바로 그걸 위해 쓰여야 한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동아일보 20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