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기획리뷰] 지구촌 시대 정체성의 역작용

"나는 레바논에서 태어나 스물일곱까지 거기에서 살았으며, 모국어인 아랍어를 통해 알렉산드르 뒤마,찰스 디킨스 등을 읽게 됐다. 어떻게 내가 그 추억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나는 프랑스 땅에서 지금까지 22년을 살아왔다. 프랑스의 물과 포도주를 마시고 프랑스어로 책까지 쓰고 있다. 이점에서 프랑스는 내게 결코 이국의 땅일 수가 없다."

레바논계 프랑스 지식인 아민 말루프(57.1993년 콩쿠르상 수상자)가 신간 '사람 잡는 정체성'(박창호 옮김, 이론과 실천)에서 털어놓은 말은 지구촌 시대'희뿌윰해진 정체성'의 실체를 보여준다. 이슬람 출신이면서도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문을 한다. "나는 프랑스 사람일까, 레바논 사람일까?" 대답은 "양쪽 다!". 하지만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는다. "단 하나의 종교,국가,인종적 소속을 자랑스럽게 휘둘러대는"(7쪽)사람들이 묻고 또 묻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느끼십니까?" 바로 그런 강요가 외국인 혐오자를 양산해낸다. 급기야 종교나 민족 정체성의 이름으로 내전과 인종청소 혹은 문명충돌을 부추긴다. '사람 잡는'것이다. 뉴욕 한복판의 그라운드 제로로 상징되는 서구 기독교과 이슬람권 사이의 충돌, 10여년 전의 추악한 보스니아 내전 …. 때문에 정체성 문제는 현대사회의 핵심인데, 한국 근현대사야말로 경직된 정체성의 구분에서 오는 혼란의 역사로 지적된다.

임지현(한양대)교수의 저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가 그것이다. 반세기 6.25 동족상잔도 그렇지만, 논란을 거듭해온 코드 인사, 지역.학벌.출신.성별에 따른 차별…. 그러나 으뜸은'5000년 단일민족'이라는 민족주의 신화다. 때문에 임지현의 개탄은 여전히 논란의 핵심이다.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의존적인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런 관점에서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외세에 의한 민족항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다."

그런 인식 때문인지 33만 명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국내 체류 70만 명 외국인들은 한국사회 주변부에 얹혀 지낸다. 하지만 정체성 문제는 이제 우리 삶의 일상으로 변했다. 장쯔이가 일본 기생으로 나오는 영화'게이샤의 추억'을 보고 "친일배우"라며 펄펄 뛰는 중국사람들, 그걸 바로보며 뜨악해하던 한국사람들은 막상 영화'신화'에 기분이 상한다. "왜 한국 여배우 김희선이 진시황제에게 바쳐진 공주 역할을 할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 정체성 문제는 임계점에 서있고, 지금 극적으로 변화 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 암시가 지난 해 10월 중앙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한민족.한반도 같은 혈연.지연 중심의 '한민족 민족주의'를 제치고 대한민국 정치공동체의 소속감이 한국인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믿는'대한민국 민족주의'가 새롭게 형성 중이라는 보도였다. 이런 변화 앞에 '정체성 구분의 죽음'을 예견한 책이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웅진닷컴)이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로부터 막강한 화력지원을 받는 그에 따르면 재래식 정체성이란 지금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고 있다. 근대 국가라는 정주형(定住形) 사회는 IT혁명.세계화 물결 속에 유목사회로 성큼 바뀌고 있다.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겨져온 사람.가치.제도.사랑.가족.여가까지도'바꿔 바꿔'열풍에 노출됐다. 자본.노동이 국경을 넘나드는 통에 지리적 연대감 마저 느슨해졌다.

아탈리는 한국사회야말로 '신유목민사회의 실험실'이라고 하는데, 충분히 귀 기울여볼 예견이다. 확실히 신간 '메가트렌드 코리아'의 지적대로 신중세적 국제사회 출현은 이제 대세다. 단 정체성 문제가 재앙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여전하다. 옛말대로 입춘에 장독 깨진다고 했던가? 문명 변동기가 위험하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사람잡는 정체성'의 저자는 제3세계권에서 세계화.IT물결의 지배자(미국)에 대한 "비장한 저주"(124쪽)의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려 하는 움직임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최악의 인종청소 현장인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뛰어난 리포트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피터 마쓰 지음)는 여전히 반면교사로 기억해둘 만하다. 초보적인 정체성 구분을 빌미로 어떻게 인간 내면의 끔찍한 수성(獸性)이 고개를 내미는가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비공산주의자끼리 저질렀던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을 토대로 한 소설가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창비)도 마찬가지다. "진오구굿은 망자(亡者)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넋굿이다.…아직도 한반도에 남아있는 전쟁과 냉전의 유령들을 이 한 판 굿으로 잠재우고 화해와 상생의 새 세계를 시작하자." 황석영은 '작가의 말'을 통해 그렇게 썼지만 '전쟁과 냉전의 유령'을 '정체성이란 유령'으로 바꿔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정체성 관련 추천 책들

▶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살림, 2001) = 원제'Out of Place'. 영국 식민지였던 예루살렘 태생으로 이집트.미국에서 교육 받은 '뿌리 뽑힌 자', 혹은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졌던 경계인의 일대기. 그런 삶이 어떻게 20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오리엔탈리즘'을 잉태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 '상상의 공동체'(베네틱트 엔더슨 지음, 나남출판, 2001) = 확실히 '두 얼굴'의 민족주의가 문제다. 소속감을 주는 편안한 자궁이기도 하지만, 그걸 절대시 할 경우 이웃 사람을 치는 칼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현대 민족주의 연구의 고전 반열에 오른 명저.

▶ '네 이웃을 사랑하라' (피터 마쓰 지음, 미래의 창, 2002) = "유고는 미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프리카도 아니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은 평상시 정장차림으로 출근을 하거나 소니TV를 즐겨보던 평범한 변호사.엔지니어들이었다." 정체성 구분에서 오는 인간 광기에 대한 특급 보고서.

▶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2001.2006) = 박노자 자체가 혈연.지연과 무관하게 형성된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한 상징이다. 귀화 한국인인 그의 한글 글쓰기 솜씨부터가 대단하다. 맵고 짠 한국.한국사회 비판이 때로는 너무 아프기도 하지만….

(중앙일보 / 조우석 기자 20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