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중국경제권 통합 전략적 대처 필요…경제발전 없으면 나눠줄 것도 없어"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 변화가 심상치 않다. 북한 위폐 제조·유통 의혹을 둘러싼 북미 간 갈등이 고조되고, 특히 미국은 대북 제재를 강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측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미국 주도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부분적으로 협력키로 하는 등 한미 관계도 재조정 국면을 맞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 상황도 어수선하다. 세계일보는 창간 17주년을 맞아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북핵 문제와 한미 관계, 남북 관계 그리고 양극화 해소 논란 등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견해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듣는다. 김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31일 정서진 편집국장과 전천실 통일부장, 황정미 정치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동교동 김 전 대통령 자택에서 1시간20분 동안 진행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31일 세계일보 창간 17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수차례 표출했다. 김 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재임 중 북핵 문제가 악화된 반면 미국이 얻은 게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미국이 잘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북미 관계가 남북 관계 발전의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고도 말했다.

― 국민의 정부 이후 남북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경협은 그런 대로 좋은 방향을 유지해 왔지만 북핵 문제 등으로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남북 관계를 총평한다면.

▲ 남북 관계는 정상회담 이전에 비하면 현격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습니다. 다만 북미 관계가 발전이 안 됐기 때문에 남북 관계가 많이 저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북 간에는 서로 신뢰심이 생겼고 긴장도 크게 완화됐습니다. 우리가 지금 서로 안심하고 한반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큰 변화가 온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북한에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 개성공단을 만들었고 금강산 관광을 통해 경제적·문화적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라고 하지만 남한은 반도가 아닙니다. 남한은 대륙으로 못 갑니다.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유럽, 서유럽 이런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시장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로 가지만 대부분 못 가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철의 실크로드라 할 수 있는 철도를 놓는 것이 21세기의 경제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를 위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은 필수적입니다. 북한이 가난하니까 동냥이나 준다는 식의 생각은 발전적이지 못합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퍼주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서,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극도의 보안 속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의 개혁·개방정책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의견은 어떤지요.

▲ 김 위원장의 이번 방중은 중국을 가서 보고 북한 경제 발전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점이 있고, 북한의 군부라든가 보수 세력에 중국의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폐쇄적 사고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2000년에 북한에 갔을 때만 해도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변화와 국제사회 진출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잘 안 되니까 대안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중국을 하나의 전환점으로 삼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위폐 문제가 6자회담 재개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위폐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 미국이 북한의 위폐에 대해서 직접적인 증거를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9월에 열린 2단계 4차 6자회담이 상당히 성공적이었는데, 미국이 그 직후 찬물을 끼얹듯 이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인지 아니면 6자회담에서 북한에 많이 양보했다고 느끼고 있는 미국 내 보수세력의 입김으로 6자회담에 영향을 주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6자회담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일을 풀어가서는 안 됩니다.

― 북한의 인권과 납북자·국군포로 등은 여전히 민감한 사안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까.

▲ 공산권은 억압과 봉쇄를 할수록 더 강해지지만, 그것을 풀고 세계를 알게 해서 자신들의 낙후된 모습을 깨닫게 하면 내부의 동요가 일어나게 되고 결국 변화가 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 가지고는 영토를 점유할 순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세계에서 입증됐습니다. 개혁·개방을 유도하니까 소련 제국도 무너지고 중국도 변하고 베트남도 변했습니다. 억압 가지고는 쿠바도 못 바꾸었습니다. 이 같은 점을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2001년 3월 정상회담에서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대화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 크게 보면 미국의 북한 정책은 일관된 것이 없습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는 더욱 그랬고, 그 결과 미국만 손해를 입었습니다. 부시 대통령 집권 1기 4년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위원도 쫓아내 아무도 북한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이 핵무기를 만들었습니다.

북한 인권을 말하는 나라는 많지만 탈북자를 받아주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말만 좋은 소리를 합니다. 또 생존적 인권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북한에 식량, 비료, 약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인도적 인권 부분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남북이 갈라져서 50년 이상 서로 생사 소식도 몰랐습니다. 국민의 정부 때까지 총 200명의 이산가족이 만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6·15 정상회담 이후 1만2000명이 만났습니다. 이제는 금강산 면회소가 생겨서 정기적으로 같이 자면서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는 누구보다 우리나라가 가장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 전 대통령의 방북에 대해 국민의 기대가 높습니다. 이번 방북에서 어떤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까.

▲ 제가 정부대표도 아니고 6자회담에 대해 어떤 성과를 낼 입장이 아닙니다. 다만 한반도 평화를 염려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6자회담 문제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 위원장 두 분이 만나서 합의할 일입니다. 저는 도움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 방북이 실현되면 구체적으로 김 위원장에게 어떤 말씀을 할 것입니까.

▲ 김 위원장과 저는 사전에 무슨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앉아서 둘이 얘기하면서 결정해 나가야 합니다. 그때(2000년)도 뭐 사전 합의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직접 얘기해보니까 잘됐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국제 정세와 남한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남한의 영화, 가수 얘기는 나보다 더 잘 압니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고 그 말이 옳으면 그 자리에서 결정합니다. 옆에 김용순 대남비서가 있었는데 그 사람한테 묻지도 않고 혼자 다 결정했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잘 알고 있고 대화 후에 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잘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기차를 타고 방북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것으로 아는데 실현 가능성은 있습니까.

▲ 가장 원하는 것은 육로를 통한 방북입니다. 2000년에도 갈 때는 비행기, 올 때는 육로가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북한 반응이 좋지 않아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통한 방북을 특별히 바란 것은 (경의선) 열차 개통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정부 고위층도 그렇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 한미 동맹이 재조정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데, 한미 동맹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한미 동맹에 균열이 있다는 시각은 현 상황을 오해하는 데서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한국은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때 미국에 많은 신세를 진 프랑스와 미국에 많은 타격을 준 독일은 모두 파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최전방에 배치된 미 2사단을 철수하는 데 동의해 줬고, 또 용산 미군기지를 옮기는 것도 정부가 돈까지 대주면서 합의했습니다. 미국과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합의했습니다. 미국에 중요한 문제를 합의해 주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종속국가가 아닌 이상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상황은 결코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의 일부 지도자가 독일과 프랑스를 제쳐 놓고 우리만 배신자처럼 대하는 것은 차별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최근 북한과 중국은 정치·경제적으로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중국이 북한을 겨냥해 ‘경제판 동북공정’을 진행 중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요.

▲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국제금융기구에서 돈도 빌려 쓰게 만들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해 배상금도 받게 하고, 세계 각국이 북한에 투자하도록 우리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중국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순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세계 모든 투자가 다 들어오듯이, 우리도 북한 들어가서 북한이 자유경제 제도를 이루도록 도와주고 압록강 건너 대륙으로 진출해 한강의 기적에서 압록강 기적의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8일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근본적 해결책’을 언급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양극화 문제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 경제를 발전시키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문제는 왕도는 없습니다. 다만 제일 중요한 것은 경제 발전입니다. 발전이 없으면 나누어 줄 것도 없습니다. 발전을 하려면 투자가 왕성하게 일어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이 돈 많이 버는 것을 칭찬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내면 애국자로 취급하고, 국민 앞에서 그 사람들이 떳떳하도록 해줘야 합니다. 돈 가지고 있는 것을 죄인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돈 버는 사람들 중에 잘못하는 사람은 그것대로 처벌하면 되지, 돈 버는 사람 전체를 죄인 취급 해서는 안 됩니다.

― 지난 3년간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 이 문제에 대해선 크게 잘못했거나 실패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잘한 점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고, 내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감정 등 많은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 저는 우리나라 정치가 상당히 잘 발전돼 왔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만큼 국민의 힘이 강해졌고 민주주의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이걸 누가 이룩했느냐. 국민입니다. 국민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 국민에게는 자정력이랄까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선거 문화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젠 돈을 주고 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잘못하면 그땐 국민이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언론이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계속 주면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리라 믿습니다.국민을 믿고 국민과 함께 가면 됩니다.

― 사학법 개정으로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여야가 사학법 재개정 문제를 논의하기로 일단 합의했지만, 최종 합의는 여전히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 대화해야 합니다. 나는 얼마만큼 양보할 수 있는데 당신은 얼마나 양보하겠느냐는 식으로 주고받는 협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그런 것입니다. 대화하고 협상하는 길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 전직 대통령으로서 다음 나라를 이끌 지도자는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까. 여야의 잠재적 대선주자들에게 조언해줄 부분이 있다면.

▲ 국민이 가장 원하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국민이 판단해서 뽑은 대통령이 설사 조금 못하고 누가 강요해서 시킨 대통령이 잘해도 전자가 훨씬 낫습니다.

국민이 자기 힘으로 뽑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국민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국민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훌륭한 대통령을 뽑을 것이고, 좀 부족하더라도 국민이 스스로 뽑았기 때문에 지지할 것입니다.

(세계일보 2006-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