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 민족의 역사지요.”(중국인) “무슨 소리하는 거요.”(한국인) “그러면 고구려가 한국의 역사라는 근거를 댈 수 있습니까.”(중국인) “광개토대왕비도 있는데….”(한국인) “광개토대왕이 당신들의 조상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중국인) 그리고 침묵…(한국인).

2020년쯤 중국과 한국의 바이어 사이에 나눌 대화의 한 대목이다 . 현재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사업’에 대해 코미디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15년 후에도 그럴까. 중국 어린이들은 왜곡된 역사라 할지라도 체계적으로 배우고 있다. 반면 우리는 역사를 사실상 배우지 않는다.

우리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국사를 사회과목의 일부로 통합, 일부 학기에만 양념수준으로 배운다. 고등학교는 더욱 심각하다.

대학입시 수능시험에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돼 있다. 구태여 국사를 배우지 않아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사법시험은 1997년부터, 행정고시와 외무고시는 올해부터 국사시험을 보지 않는다. 각종 공무원시험도 마찬가지다. 역사공부는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으로 글로벌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에 따른 것 이다.

지난해 11월30일 105세로 세상을 떠난 최태영 박사는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유언, 그가 세상을 등진 사실이 며칠 뒤에야 알려졌다. 한평생 조선 상고사를 연구해온 그는 갈수록 거꾸로 가는 역사교육에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으리라. 필자가 그를 만난 것은 1990년 1월초다. 90세를 맞은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그의 생가를 방문했다. 그는 영어책 원고를 펴놓고 오탈자를 고치고 있었다. 그 영어책은 다름이 아닌 ‘한국상 고사 입문’이었다. 그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알래스카대에서 대학원 교재로 사용할테니 영어로 먼저 편찬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우리 역사의 대부(代父)격인 이병도 박사는 그의 친구다. 그는 자신이 이병도를 역사학자로 만든 주범 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메이지대 영국법학과에 합격했는데 이병도는 일본유학시험에 실패했지요. 그래서 제가 그에게 경성제국대 역사학과에 가도록 권유했지요. 그런데 그가 일본의 앞잡이가 돼 단군을 신화 로 만드는 등 고려 이전의 역사를 모두 망쳐놓았지 뭡니까.”서울대 학장 시절 고등고시에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넣기도 한 그는 일본의 역사왜곡 만행과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 교육학자들의 어리석음에 울분을 토로했다. “77세 되던 해 우연히 사법시험 과목에 나온 국사 시험지를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고려 이전의 역사는 상당부분이 제가 아는 것과 다르지 뭡니까. 그래서 역사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102세때 한국고대사를 집대성한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는 책을 내기도 한 그는 일본의 역사왜곡은 ‘분서갱유’ 이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일제 시기 수십만권에 달하는 역사고서들을 수집, 불사르거나 자국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치밀하게 실행에 옮겼다. 이병도 박사 주도 로 이뤄진 ‘조선사편찬’도 바로 그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 때 사람인 북애가 쓴 ‘규원사화’는 압록강 바깥 사방만리가 조선땅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지리 책인 ‘산해경(山海經)’등 10여권의 중국 고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술돼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외면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갈수록 자국의 정체성(Identity)을 고취시키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민족의 경제성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압록강 위 만리는 고사하고 고구려 역사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맞는 병술년 새해는 우울하기만 하다.

(문화일보 / 오창규 산업부장 2006-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