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라차차"

30일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설날장사씨름대회 백두급 결승에서 `슈퍼 베이비' 박영배 가 이태현과의 세번째 판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뒤집기를 성공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혁 기자 2006-1-30)  

그때는 씨름 인기 대단했는데!

추석과 함께 민족 최대 명절인 설이 오면 스포츠팬들은 장사씨름대회를 떠올린다. 씨름은 고구려 벽화에도 나올 만큼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이 즐겨왔다. 어린 시절 시골 장터에서 벌어지는 씨름경기를 모래판 주변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 본 일은 중·장년층 남성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대회에서 우승한 장사에게 주려고 씨름판 옆에 매어 놓은 황소의 모습도 기억에 살아 있을 것이다.

씨름은 원래 봄부터 가을까지 단오, 백중, 한가위와 같은 명절에 맞춰 하지만 1980년대에 프로 경기가 되면서 겨울철에도 펼쳐지기 시작했다. 병술년 새해 설 연휴에도 경상북도 구미에서 설날장사씨름대회가 벌어진다.

우리 민족 고유의 경기인 씨름이 더욱 대중화되고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83년 4월 제1회 천하장사대회가 열리면서부터다. 첫 대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이만기는 최욱진, 홍현욱 등 기존 강호들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때부터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프로씨름을 '민속씨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프로야구, 프로축구에 이어 프로 경기가 된 민속씨름은 당초 두 인기 종목에 밀려 흥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민속씨름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첫 대회가 열린 서울 장충체육관은 대회기간 내내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관중이 들어찼다. 초창기 서울에서 열리던 민속씨름이 1985년 들어 지방에서도 열리자 전국적으로 인기가 폭발했다. 민속씨름이 예상과 달리 발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만기라는 슈퍼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0년대 씨름판의 거목 김성률 장사의 지도를 받으며 민속씨름판에 나온 이만기는 종전의 힘의 씨름을 기술의 씨름으로 바꾸면서 팬들을 새로운 씨름의 세계로 이끌었다. 뒤집기 등 그의 기술이 얼마나 눈부신지 팬들은 그를 이름에서 연유해 "만가지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라 불렀다.

민속씨름에 데뷔했을 때 이만기의 몸무게는 100kg이 채 되지 않았다. 한라급(100kg 미만)이면서도 자신보다 위 체급인 백두급(100kg 이상) 선수들을 모래판에 손쉽게 메다꽂았다. 기술씨름의 결과였다.

이만기 시대가 더욱 화려했던 이유는 이봉걸, 이준희와 삼각 라이벌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모래판의 신사'로 불린 이준희와 '인간 기중기' 이봉걸은 이만기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깨끗한 매너를 잃지 않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3대 천하장사대회(1984년 3월)에서 장지영이 지루한 샅바 싸움 끝에 꽃가마에 오르자 팬들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의 경기가 워낙 깔끔했던 이유도 많이 작용했다.

이만기의 은퇴에 이어 모래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장사가 강호동이다. 10차례나 천하장사에 오른 이만기는 말 그대로 씨름판의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강호동도 그에 못지않았다. 5차례나 꽃가마에 올라 이만기에 이어 역대 다승 2위를 기록했다. 강호동은 역동적인 우승 세리머니와 다양한 제스처로 씨름판의 인기를 더욱 높였다.

강호동은 요즘 방송인으로 맹활약하고 있는데 선수 시절 그의 뛰어난 순발력이 방송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강호동이 전성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씨름판을 떠난 뒤 본격적인 거인시대가 열렸고 김정필 백승일 신봉민 이태현 김경수 등이 10여 년 가까이 군웅할거했다. 1990년대 말 김영현, 2000년대 초 최홍만이 등장하면서 씨름판은 2m가 넘는 키에 150kg이 넘는 '초대형' 시대로 접어들었다.

김영현과 최홍만은 엄청난 체격에도 순발력이 뛰어나 몸무게가 아닌 기술로 모래판을 장악했다. 게다가 최홍만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기까지 한 몸짓으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최홍만 같은 스타일의 선수로 1990년대 초에 활동한 '람바다' 박광덕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민속씨름은 우수선수들의 잇따른 출현에도 불구하고 안이한 대회운영과 고질적인 내분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차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최홍만이 지난해 이종격투기인 K1으로 방향을 틀게 된 데서 민속씨름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한국씨름연맹은 올 설에는 구미에서 사흘 동안 '2006구미설날장사씨름대회'를 연다. 프로씨름단은 현대삼호중공업 한 팀이지만 개최지인 구미를 비롯해 광주 안산 수원 등 전국의 지방자치단체팀들이 대거 출전해 16개 씨름단, 114명의 선수로 역대 최대 규모가 됐다. 아마추어들이 많이 출전해 새로운 스타의 탄생도 기대해 볼만하다.

설날장사씨름대회는 1992년 2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김칠규를 첫 장사로 배출한 이후 김정필 백승일 신봉민 김경수 김영현 최홍만 등이 새해 첫 씨름판의 왕자가 됐다.

이번 대회는 KBS가 중계해 안방에서 즐길 수 있으며 29일과 30일에는 민속씨름판의 감초인 'KBS전국노래자랑'도 열려 오랜만에 씨름판이 흥겨울 것으로 보인다.

(오마이뉴스 / 신명철 기자 2006-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