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속성 재배' 고구려

고구려가 속성 재배되고 있다. 비닐하우스 속 오이처럼 초고속 배양되고 있다. 동전만 넣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인스턴트 커피처럼 '고구려'가 쏟아진다. 그런 고구려는 숙성(熟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고구려를 자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야욕이라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그 주축 기구로 고구려연구재단을 출범시킨 지가 이제 겨우 2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고구려가 대표하는 북방사 관련 연구서니 자료집이 벌써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올해만 해도 재단은 이달초에 '연구총서' 13권을 내놓더니 26일에는 ▲번역총서 3권 ▲기획연구 1권 ▲한중국제학술회의 성과물 1권 ▲한-중 관계사 연구논저 목록(근현대) 1권 외에 ▲고조선.단군.부여 자료집 상.중.하 3권 ▲중국소재 고구려 관련 금석문 자료집 1권 ▲조.청(朝淸) 국경회담 자료집 1권을 동시에 쏟아냈다.

지금까지 재단이 직접 수행하거나 간접 지원 방식을 통해 이룩한 성과물로서 단행본 형태로 나온 것이 몇 종이나 되는지는 벌써 계산이 복잡할 정도로 그 분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재단 출범은 2004년 3월1일. 직원과 조직을 갖춘 상태에서 본격적인 재단 사업 출발은 이보다 늦은 같은 해 6월10일 현판식과 개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단은 그 역사가 이제 1년 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짧은 기간에 벌써 서가 한 켠을 채울 만한 성과물을 냈으니 그야말로 혁혁한 성과라 할 것이다.

하지만 덩치만 키우다 보니, 실상 참신하다 할 만한 연구성과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수십 년 동안 되풀이하던 주장만을 재방송하는 형국을 빚고 있다.

나아가 자료집이란 것도 실상을 뜯어보면 한심한 구석이 많다.

예컨대 '고조선.단군.부여' 자료집만 해도 그 분량이 총 2천750쪽에 이르고, 이 분야 전문가들도 상당수는 책 이름조차 듣지 못했을 각종 중국고전에서 관련 자료들을 색출해 놓고 있으나, 그 대부분은 최근 국내에도 복제판으로 급속히 나돌기 시작한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CD롬을 '검색'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키워드에 '조선'이나 '단군' 혹은 '부여' 혹은 '기자' 같은 단어를 쳐서 검색되는 원문 자료를 긁어다 놓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고 우길 수도 없다. 한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중국 한자가 이 자료집에는 수두룩하게 발견된다는 것이 그 첫번째 증거가 된다. 사고전서 이후에 편찬된 중국문헌은 단 1종도 인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 두번째 증거이다.

지금이 가난 탈출이 지상과제인 '춘궁(春窮)의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무엇이건 좋으니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그것도 종류를 가릴 것 없이 많기만 하면 좋겠다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바야흐로 고구려 연구에도 '웰빙'이 필요한 시점이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6-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