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세탁소 할아버지’ 기억 속으로…78세 신인화가 류해윤

78세 ‘신인 화가’ 류해윤(사진) 씨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쌈지길 지하1층 갤러리 쌈지를 둘러보다 보면, 슬며시 미소가 배어 나온다.

친목계원들의 얼굴을 자세히 묘사하고 우람한 몸통을 붙인 데다 엉뚱하게도 배경은 금강산인 ‘육체미’ 같은 작품이나 으리으리한 한옥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그린 ‘자화상’ 등에서는 삶의 여유와 해학이 묻어난다.

종이에 수채로 주로 그렸지만 아크릴이나 사인펜도 가끔 쓴 류 씨의 그림들은 원근법 명암법을 무시하고 인물 표정이 부자연스러운 데다 색채마저 마구 쓴 듯하다. 얼핏 보면 ‘이발소 그림’을 연상시키는데도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한번도 정식 회화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정식 화가들 뺨치는 숙련미에 우리 눈에 익숙한 기법과 양식을 탈피한 원초적인 조형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원근법 명암법과 같은 기초적 모방기술을 배우지 못한 탓인지 실제와 다르다. 류 씨는 이것이 불만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독학 화가들의 장기인 개성적 표현력과 뛰어난 감수성으로 탈바꿈했다고 미술평론가 김홍희 씨는 말한다.

류해윤 씨의 2005년작 ‘나들이’. 류 씨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아 원근법과 명암법을 배우지 못해 실제와 그림이 다르다고 하소연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성적 표현과 뛰어난 감수성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평이다. 사진 제공 갤러리 쌈지

류 씨에게는 어린 시절 천재화가였다는 경력도 없고 집안의 반대 혹은 재능의 부족을 절실히 느껴 붓을 꺾었다는 청년 작가의 이력도 없다. 초등학교 시절 군 교육청에서 미술상을 받아 본 게 전부다.

그럼에도 일흔하나라는 늦은 나이에 그가 붓을 잡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돌아가신 아버지 영정 때문이었다. 제사상에 놓을 영정으로 쓰려고 서양화가이자 판화가인 둘째아들 장복(48) 씨에게 그림을 부탁했으나 영 맘에 들지 않아 자신이 직접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려본 것이 화업(畵業)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 류 씨는 “사진을 보고 10번 이상 베끼다 보니 아버지 얼굴과 비슷해지더라”고 말했다.

류 씨는 내친 김에 40여 년 동안 운영해 온 서울 성북구 길음동의 세탁소와 복덕방 한쪽 구석에 이젤을 세워 놓고 화실까지 만들었다. 그렇게 8년이 흘렀고 그동안 그려 온 그림이 총 420여 점에 달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잡념과 고민이 없어지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류 씨 그림의 원천은 그의 생활과 가장 가까운 신문 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이다. 그리고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지나온 삶의 기억들이다.

이번 전시회 제목도 ‘할아버지의 기억’이다. TV에서 본 남북 이산가족 금강산 상봉, 6·25전쟁 때의 피란 행렬, 어디선가 봤던 호랑이 민화, 고향인 경남 합천의 시골마을 풍경, 가을걷이 같은 기억 속의 풍경들, 다른 화가의 그림에서 본 장면, 가족이나 동네사람들의 초상화 등 50여 점이 선보인다. 온갖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다종다양한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그림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미술교육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그의 전시는 23일까지 열린다. 02-736-0088

(동아일보 / 허문명 기자 200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