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와 고구려의 坐食者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학자 자크 아탈리는 ‘호모 노마드-유목하는 인간’이란 저서에서 불모지(不毛地)를 삶의 터전으로 바꾸며 살아가는 노마드(nomad·유목민) 문화를 현대인의 패러다임으로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주(周)나라를 몽골족의 국가로, 미국을 마지막 정주성(定住性) 국가로 보는 등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6000년에 걸친 정착민의 역사는 600만 년에 걸친 노마드의 역사에 잠시 끼어든 것에 불과하다는 그의 분석은 의미 있다.

인류의 역사는 ‘머문 자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그 역사를 만든 것은 ‘떠도는 자의 몸’이었다는 아탈리는 1997년 ‘21세기 사전’에서 이미 ‘디지털 노마드(사이버 유목민)’란 개념을 제시했다.

최근 ‘세계는 평평하다’를 펴낸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디지털에 강한 한국인을 ‘사이버부족’(cybertribes)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데, 우리 역사의 유목성·기마성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그의 통찰력이 놀랍다.

‘머무는 자의 손’으로 기록된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고구려조(條)는 ‘좌식자(坐食者·앉아서 먹는 자)가 1만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좌식자는 무위도식하는 향락자가 아니라 무용총 벽화 등 고구려 벽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마전사(騎馬戰士)들을 뜻한다.

1만여 명의 직업적 전사(戰士) 집단이 고구려 국력의 핵심이었는데, 대한민국의 디지털 전사들은 이런 유목성과 기마성의 현재적 부활인 것이다. 광활한 대초원의 지배자였던 투르크 제국의 톤뉴쿡(Tonyuqu·중국 역사서의 暾欲谷)의 비문(碑文)이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는 창조적 행위’로 우리 내부의 고정관념들을 부수고 선조들의 유목성과 기마성을 되살린다면 21세기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조선일보 2006-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