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호령했던 기상 충천…고구려 천리장성을 가다

400km 대역사

 ◇고구려 산성 축조술이 집약된 것으로 중국 랴오닝성의 백암성(고구려 연주성)은 군데군데 붕괴되긴 했지만 치와 장대 등 1500년 전 모습이 상당부분 남아 있다.
춥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린다. 발끝은 이미 느낌이 없고, 나무 칼로 귀를 도려내는 고통이 밀려온다. 그래도 뒤편 마을을 보니 힘이 난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아이가 쉬고 있을 내 집이 보인다. 들판 저멀리 까맣게 보이는 게 모두 당군(唐軍)인가. 그동안 그렇게 패하고도 또 쳐들어온단 말인가. 그래, 죽을 힘을 다해 오늘 또다시 너희들을 물리치고 우리 땅 고구려를 굳건히 지키리라!

당의 침략에 대비해 고구려 영유왕 14년(631)부터 보장왕 5년(646)까지 16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천리장성. 그 한가운데 신성(新城)에서 당군에 맞선 고구려 병사는 이렇게 전의를 다지지 않았을까. 고구려연구재단(이사장 김정배)의 요동 고구려 산성 답사를 따라 천리장성을 찾았다. 이번 답사는 재단 연구원 등 20여명이 12월 7∼11일 중국의 푸순에서 다롄까지 요동 일대에 산재한 고구려·청동기 유적지의 현장조사 형식을 띠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답사한 곳은 랴오닝성 푸순시 북쪽 외곽 고이산성. 학자들은 이 산성을 고구려 신성으로 추정한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산을 오르자 어렴풋이 산등성이에 토성 형태가 드러난다. 토성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푸순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톈산산맥을 따라 내려온 강과 도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뒤편에는 마을이 숨은 게 한눈에 봐도 천연요새다. 역사적으로도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다. 요동에서 고구려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었다.

신성은 산등성이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시 덮어 성벽을 쌓은 토성이다. 이 때문에 산성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무너져내린 자리에 시루떡을 포갠 듯한 켜가 인공 축조물임을 보여줄 뿐이다. 성벽은 강해 보이지 않는다. 높지 않은 토성은 그나마 경사도 완만하다. 그러나 신성은 호락호락하게 적군의 입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613년부터 6차례에 걸쳐 수와 당의 침략을 받았지만 다섯 번이나 물리쳤다. 667년 함락 전까지는 가장 강력한 방어선으로 꼽혔다. 이렇게 허름해 보이는 산성을 당군은 왜 손쉽게 함락하지 못했을까. 고구려연구재단 임기환 실장이 설명한다. “수성에서 중요한 것은 성벽 자체의 물리적 공고함보다 성을 지켜내겠다는 병사와 주민의 굳건한 의지입니다.”

◇좡허현 성산산성의 암문. 뒤에 보이는 장대와 함께 중국식으로 복원돼 원형이 손상돼 있다.

사료에 따르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동북 기점이 ‘부여성’, 서남 종점은 ‘해(海·바다)’이며, 그 길이가 천리(약 400km)에 달한다. 학자들 사이엔 정확한 위치와 형태, 기능 등을 놓고 의견이 나뉜다. 흙으로 이어 쌓은 흔적이 남아 있는 눙안에서 잉커우까지가 천리장성 시·종점으로 유력하지만, 일부 학자는 종점이 요동반도의 끝 다롄이라고 주장한다(지도 참조).

실제 천리에 걸쳐 쌓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기존의 성들을 연결한 ‘산성연방선설’과 새로 축조해 천리를 쌓았다는 ‘평원토축설’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은 산세와 지형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 대부분 산성은 수륙 교통의 요지를 지나는 하천·연안 계곡의 높은 산이나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축성기술 그 자체도 뛰어났다.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만든 ‘치(雉)’와 멀리서는 알아볼 수 없게 위장해 만든 출입구 암문(暗門),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한 엄폐물 성가퀴 등도 뛰어난 축성기술을 잘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성 안에 물이 풍부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원정온 적군을 지치면 역습하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청야수성(淸野守城)’ 전법도 이 때문에 가능했다. 대무신왕 11년 위나암성을 침범한 한의 요동태수에게 고구려 장수가 살아 있는 잉어를 잡아보내자, “성 안에 물이 풍부해 이기지 못하겠다”며 물러간 일화도 있다.

그러나 뛰어난 축성술과 탁월한 지형지물 이용이 성내 주민의 안녕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랴오닝성 덩타현의 백암성(고구려 연주성)은 가장 강하게 쌓았지만 가장 허무하게 함락된 아이로니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압록강 이북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평가를 받는 백암성은 쌓은 지 1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위용을 자랑한다. 10m가 넘는 성벽과 치, 성 남쪽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가히 철옹성의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성주 손대음은 고구려 전사에 지울 수 없는 오욕을 남겼다. 645년 요동성을 함락한 당태종이 연주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에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해 버린 것이다. 무능한 지도자와 관·민의 수성의지가 약했던 연주성은 지금도 거친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고 있다. 성벽 군데군데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축 골재로 떼어져 나간 자리가 흉물스레 남아 있고, 인근 채석장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파 충격은 지금도 산성의 균열을 부추기고 있다.

비단 연주성뿐만이 아니다. 이번 답사에서 중국 내 많은 고구려 유적이 당국의 무관심과 엉터리 복원으로 몸살을 앓고 있음이 지적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좡허현의 성산(城山)산성. 중국 당국은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성벽과 장대(장수가 지휘하는 곳)를 중국식으로 복원했다. 입구에 세워진 비석에는 ‘고구려는 예전에 중국민족의 일원’이라는 제멋대로식 설명도 적어 놓았다. 다롄시 진저우구 해발 663m 대흑산에 위치한 비사성(중국 이름 대흑산 산성)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사성은 요동반도 끝자락에 위치해 고구려 해상 방어의 최전선 기지로 활약한 화려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지금은 엉터리로 복원돼 중국의 역사 관광지로 전락했다.

한국인은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고구려 유적지도 있다. 재단 연구원에 따르면 당나라 군대가 대패했던 안시성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치욕의 현장이요, 한국인에게는 민족적 자긍심을 높일 우려가 있는 유적지라는 게 이유였다. 이 때문에 일행은 안시성에서 1km나 떨어진 도로에 세워진 차 안에서 숨어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고구려는 한때 만주를 호령했다. 그렇지만 그 유적들은 이제 거의 방치·훼손되고 있다. 심지어 ‘동북공정’을 내세우며 발해·고구려사 물타기를 시도하는 중국 정부의 역사 왜곡 현장으로 둔갑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할 뿐이다.

(세계일보 200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