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 예산제약 무시한 신기루 정책

중동 석유 부국의 왕자가 큰 뜻을 품고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유학을 갔다. 그런데 경제학 기초이론 중 하나인 ‘예산 제약하의 효용 극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부족함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쓸 수 있는 재원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오래전 학생 시절 들었던 우스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도 아랍 왕자 못지않게 예산 제약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집안 살림을 거덜 내는 지름길로는 재능 없는 자식 예체능계 보내기와 아빠의 상습적인 국회의원 출마가 으뜸이다. 편하게 자란 재벌 2세들이 차가운 경쟁시장에서 고전하는 것도 ‘제약하의 최선’이라는 경제적 합리성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초기 자원이 많아도 부가 지속되기 힘든 사례는 국가 차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경제가 성장하고 소득이 증가하려면 나라의 인적 물적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재화의 확대 재생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있는 재산 팔아 당장 잘 먹을 수는 있지만 꾸준히 소득이 있는 경우에 비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천연자원이 많은 나라 중에 경제가 추락한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불과 몇십 년 만에 전쟁 폐허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나마 가진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결과다. 없는 것은 밖에서 빌려 오고 내부의 씀씀이는 줄이면서 자원 제약하의 생산 극대화를 이루려 했다. 그런데 몸으로 때우고 양으로 밀어붙이는 성장 방식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를 직시하지 못한 대가로 외환위기를 겪었다. 다행히 유동성 위기는 넘겼지만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이 상당 부분 남아 있고, 가계나 기업의 의사결정을 둘러싼 경제 환경은 더욱 불확실해졌다.

정부의 정책 환경 역시 어려워졌다. 경제 개발 초기와는 달리 경제 규모가 커진 지금은 수출시장 못지않게 내수시장의 관리가 중요하다. 지식 기반의 개방경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요소의 양적 팽창보다는 생산성의 향상이 필수다. 인구의 고령화 구조는 정부 재정의 심각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며, 가뜩이나 계층 집단 지역 간 격차 문제에 시달리는 사회에 세대간 갈등이라는 새로운 불씨를 던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던 1960년대 초반에 맞먹는 생존의 고민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른다. 오늘 태어나는 세대가 지금의 50대가 누려 온 소득상승률의 절반이라도 되풀이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배가 부르면 마음 또한 느슨해지는지 일반 대중이나 사회 지도층이나 별로 긴장감이 없어 보인다. 정치권이 마치 정부 예산에는 제약이 없는 것처럼 생색내는 법안을 쏟아 내면 일반인들은 정부 돈을 ‘눈먼 돈’으로 생각하고 엄청난 재분배 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복지제도가 확충되고 관련 예산을 늘린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비용은 무시하고 편익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역구 의원들이 고향에 다리 하나라도 더 놓겠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다. 편익은 자기 표밭에 몰리지만 비용은 전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예산 제약을 못 느끼는 이들의 도덕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어지간한 경제 사업은 민영화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이 아닐까.

아무리 세상이 불확실해도 나라의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돼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치적인 힘이 있을 경우 같은 일을 해도 정상적인 경제적 대가 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한다면, 이에 따른 비효율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질 수 있다. 더구나 정부나 정치권이 나서 이런 분위기를 조장한다면 그 나라의 장래가 밝을 수 없다. 제멋대로 빚지다 적당히 돈 찍어서 해결하려던 남미 정부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가계 빚지게 해 경기 회복하려던 몇 해 전 우리 정부의 선택도 그 과단성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다. 어차피 내 돈, 내 살림 아닌데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지나 않을까 민망할 뿐이다. 정치권 개혁과 정부 혁신을 기치로 내건 현 정부는 이런 논쟁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 스스로 되새겨 볼 일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동아일보 2005-12-15) 

[다산칼럼] 5% 성장, 무엇을 의미하나

정부는 내년 경제가 본격적인 회복세로 돌아 5%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몇 년 간 경기가 침체됐던 만큼 언젠가 풀릴 수밖에 없고, 실상 수출증대와 주가상승의 효과가 이제 내수확산으로 이어질 때도 됐다.

아무튼 하염없이 기다리던 경기회복의 소식이니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해 성장의 불씨로 살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고위자로부터 이제야 참여정부의 정책기조가 열매를 맺는 양 "무역 5000억 달러나 주가지수 1300포인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호령하는 말을 듣게 되니 참으로 놀랍다.

마치 "까마귀가 뜨자 민주화가 됐다"는 이야기같이 앞뒤를 이을 수 없는 말이다.

이처럼 엉뚱하게 득의양양(得意揚揚)하는 정부라면, 향후 이 정부에게서 어떤 자정(自淨)기능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 정부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경제적 사고능력이다.

먼저 내년 5% 성장의 의미를 보자. 이것은 참여정부의 금과옥조인 양극화 해소정책이 주효해서 서민소비증대를 일으켜 일어나는 경기가 아니다.

참여정부 집권 2년 간 한국경제가 보인 긍정적 지표는 오직 수출증대뿐이다.

이것은 이른바 "30년래의 호황기"라는 세계경제의 번영 때문이고, 이 기간에 미국 중국 일본 대만 등은 경제성장률을 2001∼2002 대비 연 평균 2%∼4% 포인트 상승시켰다.

그러나 한국은 기록적 수출증대에도 불구하고 국내소비와 투자가 극도로 침체돼 오히려 1.5% 포인트나 하락했다.

내년 5% 성장은 눌릴대로 눌린 내수경기의 내재적 압력이 부상(浮上)시키는 "기술적 반등"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며, 그 힘은 그간 축적된 수출의 소득확산효과가 제공하는 것이다.

수출이 증가하는데 대해 참여정부는 호언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당국은 오히려 세계시장에 나서면 펄펄 나는 우리기업을 왜 국내에서는 투자도 안하고 시장도 못 찾을 신세로 만들었는지 생각해야한다.

역설적으로 정치 경제 기타 국내기업환경이 너무 삭막해 우리기업들을 수출시장으로 몰아냈다는 말이 되니, 구태어 찾자면 이것이 정권당국의 공로가 될 것이다.

유가증권시장이 작금 기록적 호황을 누리고 이에 따른 자산효과가 경기상승에 도움이 됨은 사실이다.

국내 정치, 경제의 불안으로 오랫동안 저평가되어왔던 주식시장은 금년부터 기관과 개인의 뭉치돈이 몰려들며 급속히 재평가되는 중이다.

참여정부아래 투자와 소비가 저조해 이자율은 낮아졌으며, 때문에 주식보유는 보다 매력적 투자수단이 되고 있다.

또한 소비하지 않는 중산층, 예산제약 없는 정부지출, 재투자되지 않는 기업유보금, 명퇴자의 퇴직금,  풀리는 보상금 따위가 시중부동자금을 계속 늘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오르는 주가지수이니 정권이 원한다면 그 공(功)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경제활동의 지지 없이 불경기와 부동자금으로 불을 때는 증시활황과 경기부양이 얼마나 실속 없고 불안한 것인가.

참여정부의 '시대정신'은 정부가 나서서 기득권 위주의 국가기본구조를 뒤바꾸고 새로운 분배-성장의 틀을 짜는 것이다.

그 맥락아래 과거사 정리, 국가기구 확대, 공무원증원, 고용지원, 사회보장확대, 행정수도와 공기업이전, 교육평준화, 사학과 신문관계법개정, 반미 반시장정서 확대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거대한 정부지출로 예산적자는 매년 늘고 국가채무도 무서운 속도로 늘어났다.

성장-분배의 논란과 이념-이익관계의 갈등이 계속됐다.

정부가 5% 성장을 이제 고통의 과정이 청산되고 국민이 체감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증좌로 받아들인다면 그야말로 기막힌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착각은 국민을 향한 강변과 선전을 낳고 정권의 시대정신을 대놓고 추진할 무기로 활용될 것 아닌가.

2006년 희망 찬 새 해를 준비하는 우리 국민에게 정말로 존재하지 말아야 할 악몽이다.

<김영봉 / 중앙대 교수·경제학>

(한국경제신문 2005-12-18) 

지배구조

‘위원회 공화국’이 조금은 달라지려는가. 정부 조직 간의 마찰이 적지 않고 비용도 많이 든다는 비판에 행정자치부가 개편 방안을 내놓았다. 전체 381개 위원회 가운데 기능이 중복되거나 불필요한 40개를 통폐합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당장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년에 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효율적 지배구조를 유지해 주는 것은 국민 세금이다.

▷ 공기업은 정부보다 한술 더 뜬다. 외환위기 직후 기업들을 울렸던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해 가더니 노무현 정부가 민영화 찬바람도 막아 줘 여전히 온실 속에 산다. 방만 경영에 분식회계는 기본이고 경영진과 노조가 야합해 나눠 먹기, 퇴직자에게 이권 떼어 주기 등 비리가 잇따른다. 정부의 공기업 지배구조 개선 방안은 정부가 감독을 강화하겠다는 수준이다. 민영화도 아니고 자율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공기업의 이런 낭비 구조도 국민 부담을 키운다.

▷ 민간기업이 이렇게 했다간 진작 망했을 것이다. 효율 없이는 살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지배구조를 강요받았고, 이젠 외국인투자가들에게서 경영 투명성을 인정받을 만큼 변했다. 8년 전엔 이름도 생소하던 사외이사 비중이 60∼70%나 되는 대기업도 많다. 삼성 등의 지배구조와 경영 전략은 외국 경영대학원의 연구 대상이 됐다. 비슷한 경력,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정신적 친인척’이 청와대와 집권여당에 몰려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이 어제 “대기업 집단이 선진국형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도록 적극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기업의 지배·소유구조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문제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전제를 달기는 했다. 이 전제만 말했어야 했다. 비효율적 정부가 ‘국민경제’를 핑계로 실적 좋은 글로벌기업에 대해 어디까지 간섭할 수 있는 건가.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주 “이상적인 소유·지배구조를 갖춘 미국 자동차기업 GM의 실적이 가장 나쁘다”며 “정부가 생각하듯 이상적인 지배구조는 없다”고 꼬집었다.

(동아일보 / 홍권희 논설위원 200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