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사 새로보기] 광개토왕비

고구려는 한반도 고대국가 가운데 가장 늦게 일본 열도와 접촉했다. 또 접촉의 성격도 앞서 가야나 신라, 백제와 판이했다.

기록상 고구려와 왜의 첫 접촉은 4세기 말에야 이뤄졌다. 그것도 우호에서 대결로 변질해 간 신라, 처음부터 동맹관계를 맺었던 백제와는 달리 대결을 통해 왜를 만났다.

고구려와 왜의 첫 만남이자 첫 군사 대결이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신라 구원전쟁’이다. 광개토왕비는 영락(永樂, 광개토왕의 연호) 10년(400년)의 일로서 이렇게 적었다.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해 신라를 구하게 했다. 군대가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렀을 때 왜가 그 안에 가득했는데,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달아났다.

관군이 급히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러 성을 복속시켰다.’ 이 싸움은 김해 금관가야의 몰락을 부른, 고대 한반도 남부의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고구려가 신라 구원을 위해 5만명의 병력을 파견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이 섞인 것일 수도 있지만 대규모 병력을 보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신라가 가야의 ‘용병’, 또는 동맹군으로 동원된 왜병에 의해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구원으로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하구의 곡창을 장악해 이후 급속한 국가발전의 토대를 닦았으니 그야말로 신라의 큰 행운이었다.

고구려가 대병을 서둘러 파견한 것은 백제를 겨냥한 광개토왕의 남진이 시작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 비문은 ‘구원전쟁’ 기사 바로 앞에 399년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백제가 노객(奴客, 종)이 되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대왕이 친히 평양으로 내려왔다. 그때 신라가 사신을 보내 대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으로 가득 밀려와 성곽과 해자를 파괴하고 있어 구원의 명을 청한다고 했다.

대왕이 인자한 마음으로 신라의 충성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 그런 뜻을 전하게 했다.’

‘백제의 맹세’에 대한 비문의 기사가 지금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이른바 ‘신묘년(辛卯年, 391년)조’, 정확하게는 ‘병신년(丙申年, 396년)조’다.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고 있지만 판독된 한자를 일반적으로 읽으면 대강 이런 뜻이 된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했는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토벌했다. 군대가 남쪽에서 많은 성을 얻었지만 그 국성(國城, 수도)이 굴복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싸우기를 거듭했다. 이에 대왕이 크게 노하여 한강을 건너 국성을 에워싸자 잔주(殘主, 백제 왕)가 남녀 노예 1,000명과 베 1,000필을 바치며 대왕 앞에 꿇어앉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서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제를 쳐부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로서 이를 내세우려는 일본과의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가 1972년에 제기한 ‘비문변조설’이다. 일본측이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비문의 탁본이 석비 표면에 석회를 바르고 적당히 글자를 판 후에 떠 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883년 대륙진출을 위한 공작원으로 파견됐던 일본 참모본부 요원 사카와 가게아키가 일본에 가져온 탁본이었으니 일본측이 조선 침략의 역사적 정당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했다는 추정을 낳기에 족했다.

이런 추정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거친 후의 기억을 과거로 소급한 것으로서 논리적 근거가 취약했다.

즉, 1883년 당시에 일본의 국가전략이 이미 조선의 식민지화로 굳어져 있었고, 그것이 군 지휘부에 하달됐으며, 당시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가 일본이 그런 전략을 다듬을 만한 상황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주장을 반박해야 할 필요성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런 약점은 간과되고 ‘변조설’은 큰 힘을 발휘했다.

나중에 일본과 중국에서 사카와 탁본과는 다른 원석 탁본 등이 확인됐고, 사카와 탁본 이전에 이미 많은 석회탁본이 중국인에 의해서도 만들어졌으며, 대조 결과 사카와 탁본에서 특별히 ‘의도적 조작’이 밝혀지지 않음으로써 날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만 일반인들은 아직도 광개토왕비의 ‘신묘년조’가 일본에 의해 조작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신묘년조’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허황된 내용을 담았을까. 일제 황국사관의 묵은 때가 빠지고, 그 대항형으로 위력을 떨쳤던 민족사관도 함께 거품이 빠지면서 최근 한일 양국 학계는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열린 눈으로 비문을 읽을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시각이 양국에서 힘을 얻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광개토왕의 위업을 칭송하려고 했?고구려인들이 그런 내용으로 쓰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당시 한반도와 일본의 객관적 정세로 보아 고구려인의 인식이 상당히 과장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정벌 및 신라 구원 전쟁을 정당화하고, 그 의의를 부각하기 위해 왜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려고 했다.’

왜가 신라를 자주 괴롭혔다는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사실, 백제의 정치ㆍ문화적 힘과 왜의 풍부한 인력을 축으로 한 동맹ㆍ제휴 관계 등을 중국의 ‘중화주의’ 시각과 닮은 고구려 특유의 눈길로 바라본 결과가 ‘신묘년조’로 나타났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다. ‘신묘년’은 고구려식 제국주의 사관의 결과인 셈이다.

고구려와 왜의 군사대결은 광개토왕비문의 ‘갑진년(甲辰年ㆍ404년)조’에도 한 차례 더 나온다. ‘왜가 괘씸하게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했다. 왜구가 패배하여 참살된 자가 무수히 많았다’는 내용이다.

광개토왕비가 기록한 고구려ㆍ왜 군사충돌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왜의 일방적 패배로 끝났다. 당시 고구려의 힘은 중국을 위협할 지경이었으니 왜가 국력을 총동원해 맞붙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초기의 군사접촉 경험을 통해 왜는 고구려의 강성함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고, 그 결과 취한 태도가 고구려의 적대감을 완화시킨 듯하다.

신라와 백제에 비해 출발이 늦긴 했지만 고구려가 일본 열도에 강한 문화적 영향을 미친 흔적을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그런 자연스러운 관계 정립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백제 유민의 뒤를 이어 일본 열도로 대거 이동한 것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고구려는 일본에 짙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담징의 호류지(法隆寺) 금당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문화 전파 정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7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다카마쓰(高松) 고분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형식은 물론이고, 그려진 복장까지 같다.

기토라 고분의 사신도는 고구려 벽화를 그대로 옮긴 듯하고, 천문도의 별자리는 평양 부근에서 바라본 하늘을 담았다. 당시 일본 정치의 중심지역에까지 고구려계 호족집단이 파고 들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일본에 활발히 진출한 백제계와 함께 고구려계 ‘도래인’도 일본 지배층 형성에 참여했다.

통일 이후 시간이 흘러 야마토(大和) 정권의 적대감이 누그러진 후 신라계의 활발한 진출과 합쳐, 일본 고대국가의 지배층과 문화에 미친 한반도의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한반도가 당시 동북아의 문화 발신지인 중국과의 근접성 측면에서 일본에 비할 바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간한국 / 황영식 논설위원 2005-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