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고고학의 총아 왕궁리 유적

왕궁리 백제 토기

호자(虎子)라고 일컫는 유물이 있다. 오줌을 배설하기 위한 용기의 일종인데, 하필 호랑이 호(虎)자를 써서 표현할까? 그 오줌통 모양이 호랑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중국 동진(東晉)시대 저명한 도사요 의학자인 갈홍(葛洪.283-343)의 저술로 유명한 도교 경전인 포박자(抱朴子)와 같은 성격의 신선 열전인 신선전(神仙傳) 외에도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서경(西京)이란 전한(前漢) 시대 서쪽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지금의 시안(西安)을 말한다. 서경잡기는 이곳을 무대로 펼쳐진 잡다한 일화들을 정리하고 있다.

서경잡기에는 한대(漢代) 풍습 중 하나로 "옥(玉)으로 호랑이 모양을 만들어 변기로 사용하니, 시중(侍中)에게 그것을 들게 하고는 황제가 출행할 때 따라다니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이 아마도 휴대용 소변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만하며, 호자(虎子)라는 말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 문헌이 될 것이다.

한데 조금 이상한 점은 이런 변기 유물이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옛 백제시대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분명한 화장실이 확인된 곳도 그렇고, 호자 유물 또한 몇 점 되지 않으나 그것 모두가 백제인들이 쓰다가 버린 것들이다.

신라, 고구려, 가야인들이라고 배설을 하지 않은 '이상 체질'이었를 리 만무할 터. 그러나 그들의 변기통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408호).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89년 이후 2005년 현재까지 연차 발굴을 계속한 결과 사비시대 말기 백제가 요긴하게 활용한 곳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 규모라든가 건축물 구조를 볼 때 삼국유사에서 말했듯이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년)이 한 때 천도했던 곳일 가능성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백제 외에 이곳을 긴요하게 활용한 주체는 통일신라. 하지만 유물이나 유적 주축은 지금까지는 백제시대가 지목되고 있다.

익산 왕궁리 출토 백제 '장독'

지금까지 한국에서 대체로 발굴 현장은 발굴조사와 더불어 방치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이 왕궁리 발굴현장은 현장 체험학습장 개념을 도입했다. 유적에서는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러한 발굴조사 모습은 언제든 관람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조사된 주요 유물은 발굴장 한 켠에 마련된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지난 10월18일에 문을 연 왕궁리 전시관에는 왕궁리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중요 유물들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비시대 백제 화장실이 여러 곳에서 확인됐는가 하면, 그 뒤처리용 나무막대도 여러 점이 출토됐다. 바야흐로 왕궁리는 화장실 고고학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우뚝한' 위상은 이 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휴대용 변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2001년 석축 배수로 내부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높이 16.8㎝, 길이 31.5㎝로 그 기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엉거주춤 자세'를 잡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양측면에는 손잡이를 각각 달아 휴대의 간편함을 구하고 있으며, 그 전면에는 소변의 '튀김'을 방지하는 방어벽을 설치해 놓았다. 이는 "시중(侍中)에게 그것을 들게 하고는 황제가 출행할 때 따라다니게 했다"는 서경잡기 기록을 연상케 한다.

다른 전시유물 중 동체 최대지름 77㎝에 높이 76㎝에 이르는 대형 '장독' 또한 요주의 대상이다. 변기통이 아닐까 하는 질문에 송의정 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한다. 2001년 조사에서 발견될 당시, 이 '장독' 아가리에는 큼직한 돌 한덩이가 놓여 있었으며 몸체는 온전히 땅 속에 매몰돼 있었다.

유적이 폐기된 장구한 세월에 매몰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현장조사를 맡고 있는 문화재연구소 전용호 학예연구사는 "백제시대 당시에 이미 그런 상태였음이 확실하다"고 지적한다.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항공 전경

건축물 인근에 땅을 파고 아가리는 돌로 봉한 이 장독은 도대체 기능이 무엇이었을까? 혹여 '성주단지'일 가능성은 없을까?

현장과 함께 하는 유물은 많은 상상력을 불어줄 수도 있다. 백제의 '변기문화'를 알고 싶거든 왕궁리로 가보는 것이 어떨까? ☎041-833-5901.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200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