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외교에서 할 말 하려면 계산부터 하라”

한승주 고려대 교수는 정년퇴임에 앞서 그제 가진 고별강연에서 “외교는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뤄져야 하며 감정을 못 이겨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언(苦言)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민족끼리’ 코드와 감정을 앞세워 이뤄져온 ‘할 말은 하고 얼굴 붉힐 때는 붉히겠다’는 거친 외교행태가 재앙(災殃)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김영삼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 현 정권에서 주미대사를 지낸 한 교수의 지적이 공감을 얻는 것은 실용과 실리의 대차대조표를 무시한 현 정부의 외교가 이미 국민부담으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자주’를 앞세워 추진 중인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작업만 해도 천문학적인 비용 부담을 예고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 없는 미군이 한반도에 더 주둔할 이유가 없다”는 합리적 담론(談論)은 자주라는 정권코드 앞에 발붙일 틈이 없다.

정부가 연말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의 방일(訪日)을 취소하자 일본 측은 외상이 나서 “대통령 안 온다고 관계가 단절되느냐”고 응수했다. “할 테면 해 보라”는 상대의 자세에는 ‘대일(對日)외교전쟁’을 진두지휘해 온 노 대통령에 대한 반감(反感)이 짙게 깔려 있다. 심지어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논의하는 장관급 실무회담에서조차 과거사 논쟁이 벌어지는 형편이다.

현 정부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사와 ‘기생충 알 김치 파동’ 등을 둘러싼 마찰로 앙금이 쌓였다. 미일에서 멀어진 거리만큼 중국과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모두가 어설픈 아마추어리즘과 망자존대(妄自尊大)의 상황인식이 빚어 낸 결과다. 그런데도 정권 관계자들은 입만 열면 ‘외교목표 초과 달성’을 자랑한다. 코드와 감정을 앞세운 외교가 국내정치 측면에서는 흑자를 봤다는 계산 때문인가.

한 교수는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임을 잊지 말고 일방적 승리가 아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말을 아끼고 상대 의견을 경청하라”고 주문했다. 이 충고가 ‘쇠귀에 경 읽기’로 그치면 결국 국민이 힘들어진다.

(동아일보 2005-12-10) 

한승주 고려대 교수 고별강연 “외교서 이분법 태도는 금물”

“강대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그 나라의 보호와 협조를 받는 ‘굿 보이(good boy)’도, 강대국과 사사건건 다투고 문제를 일으켜, 강대국이 미운 놈 귀찮아 떡 하나 더 주게끔 해 실속을 차리는 ‘배드 보이(bad boy)’도 되지 맙시다. 자존심이나 자주의식을 꺾지 않으면서 동시에 강대국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스마트 보이(smart boy)’가 되어야 합니다.”

내년 2월 정년퇴직을 앞둔 한승주(韓昇洲) 고려대 교수가 8일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고별강연을 갖고 한국 외교에 대해 고언을 던졌다. 한 교수는 28년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93∼94년 외무부 장관, 2003∼2005년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국내의 대표적 외교학자로 평가받는다.

한 교수는 ‘외교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학부 강의 마지막 수업을 확대해 열린 ‘통념과 실재’라는 주제의 이날 강연에서 대미관계와 관련해 ‘자주파’와 ‘동맹파’라는 2분법을 넘는 외교 전략으로 ‘스마트 보이 외교’를 강조했다.

한 교수는 특히 “우리는 간혹 ‘할 말은 해야 한다’거나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무엇이 할 말이고 어떠한 때가 얼굴을 붉힐 때인가 하는 것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뤄져야지 감정에 못 이겨 또는 자신의 심리적 만족을 위해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은 좋은 외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외교에서 감정을 앞세우는 것을 경계했다.

한 교수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나와는 상관없다는 오불관언(吾不關焉)도 안 되고, 동시에 이를 정치화하여 북한 정권 자체에 변화를 가져오는 방편으로 삼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라며 “‘조용한 외교’와 ‘공개적 외교’ 중 상황에 따라 북한 주민의 인권과 안녕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안을 선택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역효과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당위론적으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필요한 일일 수 있다”며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불참한 한국은 다른 나라들에 수세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외교는 우리 일상의 대인관계와 비슷하다”면서 좋은 외교를 위한 8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즉 △일방적 승리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라 △말을 아끼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이라 △상대에 대해 건전한 회의(懷疑)를 가지라 △일이 안 될 경우에 대비한 ‘Plan B’(예비전략)를 세우라 △오만함과 피해의식을 모두 버리라 △실용적 태도를 지니라 △포커할 때 표정과 바둑 둘 때 몇 수를 미리 읽는 전략을 지니라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조화롭게 이끌라 등이다.

이날 강연에는 고려대 학생 외에도 어윤대(魚允大) 고려대 총장과 이홍구(李洪九) 전 총리를 비롯해 학계 정계 언론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해 700석 규모의 인촌기념관 대강당을 가득 메웠다.

(동아일보 / 권재현 기자 2005-12-9) 

“강대국 상대 외교 실리 우선 ‘스마트 보이’ 돼야”

한승주 前 외무부장관 고려대 ‘고별 강의’ 눈길

외무부장관과 주미 대사를 지낸 한승주(65) 고려대 교수가 8일 ‘고별 강의’를 했다. (문화일보 12월 8일자 27면 참조)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이날 강의의 주제는 ‘외교란 무엇 인가-통념과 실제’라는 다소 학문적인 주제였지만 행간에는 현 정부에 충고를 하는 듯한 ‘뼈있는’ 말들이 녹아 있었다.

한 교수는 “우리는 간혹, ‘할 말은 해야 한다거나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말이지만, 무엇이 할 말이며, 어떠한 때가 얼굴을 붉힐 때 인가 하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해 결정해야한다”며 “만약 그것 이 철저한 계산에 의해 화를 내고 심한 말을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감정에 못 이겨 또는 자신의 심리적 만족을 위해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하고 화를 내는 것이라면 이는 좋은 외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정, 이념, 정서보다는 실익과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이미 상대방에게 한 수 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도 했다.

약소국이 가지게 되는 ‘피해의식’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 교수는 “외교를 할 때 피해의식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강대국이 오만하면 외교적으로 그만큼 손해를 보듯이 상대적으로 약자가 강자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그 반감으로 외교를 수행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역사적으로 여러차례 외침을 받아왔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면서도 “그러나 ‘추종’이냐 ‘ 협력’이냐의 이분법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자존심이나 자주의식을 꺾지 않으면서 강대국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나가는 ‘스마트 보이(smart boy)’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강대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그 나라의 보호와 협조를 받는 ‘굿 보이( good boy)’와 강대국과 사사건건 다투고 문제를 일으켜, 강대국이 미운 놈 귀찮아 떡 하나 더 주게끔 해 자기 실속을 차리는 ‘ 베드 보이(bad boy)’ 외에 제 3의 방법인 ‘스마트 보이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오늘날의 외교관은 말을 잘하고 많이 해서, 또는 허세를 부려서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며 “외교에 있어서는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고, 행동보다도 실제의 실력이 더 중요하다. 오히려 말은 적게 할수록 좋고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묘수’ 를 던졌다. 한 교수는 “북한인권문제는 인권문제인 동시에 정치 문제이기도 하다”며 “따라서 우리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 이라며 오불관언(吾不關焉)해서도 안되고 동시에 이를 정치화해 북 한 정권자체에 변화를 가져오는 방편으로 삼는 것이 주목적이 돼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조용한 외교’와 ‘공개적이고 떠들썩한 외교’ 중 상황에 따라 북한 주민의 인권과 안녕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안을 선택하는 노력일 것”이라고 말했다 . 한 교수는 또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 효과가 있느 냐, 아니면 역생산적이냐 하는 문제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며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내란선동죄로 사형언도까지 받았을 때 당시 미국 카터행정부가 처벌하지 말라고 공개적인 압력을 행사했지만 실제로 효과를 본 것은 새로이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이 전두환 대통령을 비밀리에 접촉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구 소련은 미국이 공개적으로 경제적·외교적 압력을 가한 결과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고 유대인들의 이민을 허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역효과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북한인권문제 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당위론적인 입장에서는 물론 외교적으로도 필요한 일일 수 있다”며 “북한 인권문제에 불참한 한국은 비록 투표 후에 ‘투표 사유’로 설명 내지 변명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에 수세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후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박사학 위를 받았으며,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를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직해 왔다.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3~1994년 외무부 장관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2003~2004년엔 주미대사를 지냈다.

(문화일보 / 유희연 기자 2005-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