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한·중·일 역사전쟁, 구경만 할건가

한국과 일본, 중국이 동북아 역사의 주도권을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다. 한·중·일의 역사 전쟁은 고조선의 정체와 삼국의 건국 시기 등 고대사 논쟁으로 압축된다. 중·일 양국은 한국사에서 고조선을 삭제하고 삼국의 건국 연도를 의도적으로 늦추는 등 역사 왜곡에 혈안이 돼 있다. 그러나 주변국의 역사 침탈 기도에도 우리 정부나 역사학계는 통일된 학설조차 없이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손을 놓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단군조선까지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대학 역사교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세계통사’(인민출판사) 1983년판에는 “고대 조선 역사상 이미 수세기에 걸쳐 고조선국이 존재했다”고 기술했지만, 97년판에는 한국사의 범위를 현재 한국 영토로 제한하고 있다. 그리고 83년판에는 “기원 전후 우리나라(중국) 동북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조선반도 북부로 발전해 5세기 초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97년판에는 “중국 소수민족 지방정권이었다”로 바꿨다. 그리고 발해는 당나라 지방정부이므로 세계사가 아닌 중국사에서 기술할 내용이라는 시각에서 발해사를 아예 빼버렸다.

한국은 일제 강점기에 역사 침탈의 뼈아픈 경험을 했다. 1922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조선사’를 편찬한 일제는 고대 일본의 역사가 한민족 역사의 부속사라는 숙명적 열등감에서 이를 숨기기 위해 계획적인 역사 날조에 나섰다. 그들은 자고로 북은 한(漢)의 식민지였고, 남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억지주장을 통해 자국의 우월감을 조장하고 조선 강점을 합리화했다. 일제의 간악한 역사 왜곡은 우익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후소사판 역사 교과서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계승한 이 책은 한국사에서 고조선을 누락시키고 백제와 신라의 건국 연대를 4세기경으로 늦추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파문도 실은 이러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우리 고대사를 자국의 역사 논리에 따라 부속국 정도로 꿰맞추고 있는데도 우리 역사학계는 고조선의 실체와 삼국의 건국 시기를 놓고 공방만 벌일 뿐이다.

당장 우리 역사학계의 이러한 복잡한 내홍이 국민의 역사 교육 현장인 국립박물관에서 재연되고 있다. 국민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최근 개관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1층 고고관 입구에 걸린 고고학 편년표에서는 고조선을 고고학적 유물 부족을 이유로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면서 논쟁이 촉발됐다. 여기다가 국립광주박물관이 삼국 시대의 건국 연도를 300년경으로 표시하면서 식민사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우리 박물관들이 주변국의 왜곡된 역사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은 분노한다.

고고학적 사료 부족을 이유로 고조선을 연대표에서 빼버리고, 일본 학계의 주장을 판에 박은 듯이 삼국의 건국 연대를 300년경으로 표기하는 국립박물관들의 행태는 우리 역사학계의 고대사 연구 부재와도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 등에 고조선 관련 기록이 나와 있고 북한 학계에서는 이 분야 연구에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데도 우리 역사학계의 고대사 연구는 그야말로 ‘탁상공론’ 수준이다.

그 동안 우리 정부는 중국이 고구려사 왜곡에 나서자 고구려재단을 만드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아직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결국 여론무마용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이제 우리 역사는 우리의 눈에 맞춰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결코 상대방을 꺾을 역사 논리를 개발할 수 없다는 점을 정부나 역사학계는 명심하고, 역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대응책을 하루빨리 내놓아야 할 것이다.

(세계일보 / 권오문 논설위원 2005-12-8)